항목 ID | GC042008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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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槿友會東萊支會 |
영어의미역 | Geunuhe Dongrae Branch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송희 |
[정의]
1928년 부산 동래 지역에서 설립된 근우회 소속 지회.
[설립 목적]
근우회 동래지회는 여성의 단결과 의식 훈련을 통해 여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이익을 옹호하고, 나아가 반(反)제국주의 반(反)봉건 운동을 실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변천]
근우회 동래지회는 1928년 5월 19일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동래여자청년회를 해체하고 근우회의 강령과 목적에 따라 설립되었다. 설립 준비 위원은 권복해(權福海), 김수선(金水先), 김계년, 이가우, 송말순 등이었다. 이들은 동래청년동맹과 적광회와도 일정한 관련을 갖고 있었던 인물들이었다. 초기 임원으로는 서무부에 권복해, 재무부에 이영복, 선전부에 김주중, 교양부에 이기년, 조사부에 최성애·정연부·이가우 등이 활동하였다.
1929년 현재 회원은 116명이고, 회원의 연령은 18세~30세이며,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학력을 가진 여성이 많았고, 직업을 가진 여성은 31명이었다. 1930년 제2회 정기 대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이현순, 위원에 전부념·구수련·박소수(朴小守)·김명수·권복해·하덕술 등이 선출되었다. 한편 1929년 제2회 전국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을 때 근우회 동래지회를 대표하여 박차정, 김수선, 김계년이 중앙으로 진출하였다. 박차정은 중앙 집행 위원과 상무위원으로, 김계년은 대의원으로, 김수선은 중앙 집행 위원 후보 위원으로 각각 선출되었다. 1931년 4월 정기 대회에서 당분간 해소를 보류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나, 이후 활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결국 이후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근우회 동래지회는 초기에 부인상회를 설립하여 재정 확보를 시도하였고, 회원 모집과 친목 단체 훈련을 위하여 원유회를 개최하였다. 백색 의복 금지와 같은 계몽 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조직이 다소 안정된 후에는 근우회 동래지회 기장분회를 설치하였는데, 1929년 7월 근우회 동래지회 기장분회를 근우회 기장지회로 승격시켰다. 이 무렵 노동 야학을 운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의 활동으로 여성의 계몽에도 앞장섰다.
근우회 동래지회의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무산(無産) 여성인 여성 노동자에 대한 것이었다. 1929년 3월 정기 대회에서 근우회 동래지회는 ‘동일 노동에 대한 임금 차별 철폐건’을 전국 대회에 건의하기로 결정하였다. 1930년 1월 조선방직 총파업이 일어나자 근우회 동래지회도 파업 노동자를 지원하였다. 1931년에는 “금후로는 특히 노동 여성 운동 세력의 강화 대책을 주 방침으로 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형식적으로 해소의 보류를 선택했지만 기본 입장은 농민 조합과 노동조합 속에서 여성 운동을 강화하자는 해소론자의 입장을 수용한 것으로, 이후 여성 운동의 중심을 무산 여성에 두었다.
[의의와 평가]
근우회 동래지회는 1920년대 여성 운동의 중심으로, 부산 지역 여성 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무엇보다도 여성의 생존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여성 운동의 기본 관심을 여성 노동자에 두어 기존의 여자 청년회 운동이 부르주아 여성을 중심으로 하던 것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여성 문제의 해결을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풀어나가고자 하여 다른 운동 단체와의 연계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