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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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斗烈 |
영어음역 | Jeong Duyeo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285번길 22[칠산동 36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정두열(鄭斗烈)[1922~2003]은 1922년 12월 27일에 경상남도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 496번지에서 태어났다. 1940년 11월 23일 부산 항일 학생 의거[일명 노다이 사건] 당시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1940년 11월 21일부터 22일까지 이틀간 경상남도 내 중학교 학생 전체가 동원된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이 실시된 데 이어, 23일은 제2회 경상남도 학도 전력 증강 국방 경기 대회가 부산 공설 운동장에서 개최되었다. 전날 경상남도 연합 군사 대연습 때부터 차별과 모욕으로 분노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23일의 경기에서 심판장 노다이[乃台]의 편파적인 대회 진행과 일본인 학교를 우승시키려는 조작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당시 응원석에 있던 정두열은 “부산제2상업학교와 동래중학교를 중심으로 한 1,000여 명의 한국인 학생들은 폐회식 때 일본 국가 대신 「아리랑」을 큰소리로 불렀고 이를 제지하는 일본인들에 대항해 ‘엉터리 심판을 취소하고 민족 차별을 없애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시가지로 나가 일본 경찰에 대항해 투석전을 벌였다.”고 회상하였다. 이 일로 정두열을 포함하여 학생 200여 명이 검거되었다. 주모자 15명이 투옥되었고 21명이 퇴학, 44명이 정학, 10명이 견책 등의 징계를 받았다. 정두열은 부산지방재판소에서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부산형무소에서 1년 1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정두열은 풀려난 직후인 1942년 초 학업을 포기한 채 울산의 암자에 들어가 1년여를 보냈다. 이어서 곧바로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봉천의 한 전기회사 기숙사에 야학을 열어 우리글을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등 애국·애족 운동을 계속 하였다. 정두열은 1977년부터 유공자 지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당시 상황을 입증해 줄 만한 근거나 기록을 제시하지 못하여 번번이 기각을 당하다가 1993년에 지정을 받았다. 경기도 의왕시에 거주하였으며 2003년 2월 2일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