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6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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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泰國 |
영어음역 | Go Taeguk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김창욱 |
[정의]
부산에서 활동한 성악가·합창 지도자·음악 교육자.
[활동 사항]
고태국(高泰國)[1917~1977]은 1917년 8월 7일에 경상북도 고령의 한학자 집안에서 5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일본 고베[神戶]의 흑신상업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1936년부터 1940년까지 도쿄의 동양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1940년부터 1944년 4월 30일까지 도쿄 가마다음악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44년 6월 16일에 대구사범학교 교유(敎諭)로 부임하면서 귀국하였다. 1947년 11월 부산에 정착하여 동래중학교·금성고등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 교사와 부산교육대학 교수를 지내면서 성악가이자 합창 지도자이며 음악 교육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성악가로서 고태국은 1931년 4월 6일과 1937년 3월 10일 두 차례에 걸쳐 동경 음악 콩쿨에서 1위로 입상하면서 두각을 드러냈다.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1년 3월 14일 구단하군인회관(九段下軍人會館)에서 개최된 제6회 신인 소개 연주회였으며, 이후 3월 28일 부민관(府民館)[현 서울특별시의회 건물]에서도 연주하였다. 대구사범학교 교유로 있을 때에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전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였다. 또한 1946년 8월 10일과 11일 이틀간 부산 경남중학교 강당 및 동래극장에서 독창회를 열었는데, 이는 부산 구휼동맹본부가 주최한 공연으로 소프라노 안정숙(安貞淑)이 찬조 출연하였고, 부산관현악단과 부산기독연합찬양대가 특별 출연하였다.
이후 고태국은 1955년에 발족한 ‘뮤직클럽’의 일원으로서 3월 12일 남성여자중학교 강당에서 개최한 신춘 음악 연주회에 참여하였고, 1959년 이상근·최인찬이 주축이 된 작곡가 모임 ‘Group A’에서 창작 가곡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1962년 4월 27일에는 부산대학교에서 독창회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서는 슈베르트의 연가곡 「물방앗간의 아가씨」 전곡을 노래하였다. 고태국의 레퍼토리는 유독 낭만성이 강한 슈베르트의 리트(Lied)[예술가곡]에 집중되었다.
합창 지도자로서도 고태국은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1945년에 대구사범학교 합창단 일부와 일반인으로 구성된 서라벌합창단을 이끄는 한편, 부산사범학교[현 부산교육대학]에 재직하던 1957년 10월에는 음악 교사 및 교수 12명으로 구성된 콜 에오리안(Chor Aeolian) 합창단을 만들어 연 2회의 정기 연주회를 열었다. 여기에는 김진안(金璡安)·김창배(金昌培)·김철휘(金哲輝)·김준선(金俊善)·하오주(河五柱)·유신(劉信)·방부원·박영(朴暎)·박용흡(朴鏞洽)·김종일(金宗一)·이상근(李相根)·제갈삼(諸葛森) 등이 참여하였다.
피아노 반주는 제갈삼이 맡았고, 이상근과 유신이 편곡을 담당했는데, 클래식 음악부터 경음악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였다. 또한 콜 에오리안의 두 번째 연주회는 1959년 2월 21일 2회에 걸쳐 열렸는데, 여기서도 흑인 영가를 비롯하여 아일랜드와 나폴리 등 세계 민요와 영화 음악을 편곡하여 무대를 꾸몄다. 그 밖에 1960년 9월부터 부산연합합창단과 은성합창단도 조직해서 지도하였다.
음악 교육자로서의 고태국의 활동은 부산사범학교와 그 후신인 부산교육대학에서 지낸 20여 년간의 교수 생활을 통해 뚜렷이 드러났다. 여기서 시창, 합창, 전공 실기와 음악 교육학 등의 교과목을 담당하였다. 그의 음악 교육 목표는 바르고 즐겁게 음악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으며, 사회인으로서 만족감을 얻는 데 그 가치를 두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960년과 1961년에 경남음악교육연구회[현 부산음악교육연구회] 회장을 지낸 것도 이러한 그의 가치관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외에도 고태국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부산광역시 중구 남포동에 위치한 미화당 음악실·아포로 음악실·칸타빌레 음악실 등의 음악 감상회에 해설가로 나서면서 지역에 클래식 음악, 특히 오페라 음악의 저변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일간지에 실린 음악 비평문으로 「에오리안합창단-직장 합창단의 조직」[『부산 일보』, 1959. 1. 21], 「정봉옥 바리톤 독창회를 듣고」[『부산 일보』, 1973. 11. 17], 「봄맞이 우리 가곡의 향연」[『부산 일보』, 1974. 2. 26]이 있다.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1월 17일에 부산시 문화상[음악 부문]을 수상하였고, 1999년 10월에는 부산일보사 주최로 ‘고태국 성악 콩쿠르’가 창설되었다. 이 콩쿠르는 2007년 제9회부터 ‘부일 성악 콩쿠르’로 명칭이 개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