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3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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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池龍俊 |
영어음역 | Ji Yongju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청룡동 546]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나철회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지용준(池龍俊)[1894~1971]은 1894년 5월에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소토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범어사(梵漁寺) 지방학림에 재학 중 범어사의 3·1 운동에 참여하였다. 범어사의 3·1 운동은 서울의 3·1 운동에 참여하고 3월 4일 부산으로 돌아온 김법린(金法麟), 김상헌(金祥憲) 등이 독립 선언서를 전하면서 계획되었다. 이들은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하였다. 하루 전인 17일 밤에는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림 졸업생의 송별회가 개최되었는데, 김영규(金永奎)가 축사 도중에 만세 시위를 독려하여 사기가 충천하였다. 이후 지용준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은 동래구 복천동에 있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으로 자리를 옮겨 다음날의 거사 일정을 점검하였다. 그러나 명정학교 오계운(吳啓運)의 밀고를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과 헌병의 습격을 받아 다수가 체포되었다.
이때 지용준은 위기를 모면하여, 검거를 피한 동료들과 다음날인 18일 동래 장터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 결과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부산감옥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범어사 지방학림을 졸업하고 범어사에서 머물렀으며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유랑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후 동래구 연산동에 거주하면서 연산2동 동장을 지냈고, 범어사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유공자 추모비 건립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지용준은 1971년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