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2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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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公壇 |
영어음역 | Mangongdan |
영어의미역 | Mangong-dan Shrine |
이칭/별칭 | 만공단비(萬公壇碑),만공기공비(萬公紀功碑) |
분야 |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자성로 99[범일동 590-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화진 |
[정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있는 부산진성에 있었던 임진왜란 참전 명나라 장수 만세덕을 기리는 제단.
[건립 경위]
임진왜란 이후 부산의 지방관들은 전쟁에 참여하여 힘쓴 이들을 기리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시행하였다. 그 가운데 명나라에서 파견하였던 장수 만세덕(萬世德)[1547~1602]의 공을 기리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제단을 세웠는데, 이를 만공단(萬公檀)이라 한다.
『숙종실록(肅宗實錄)』 및 『충렬사지(忠烈祠志)』에 따르면, 1709년(숙종 35) 동래부사로 부임한 권이진(權以鎭)은 만세덕의 전공(戰功)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조정에 묘우(廟宇) 설치를 건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때 권이진은 만세덕과 관련된 비석을 보수하였는데, 이 비석은 1599년 명나라 장사(將士) 59명의 이름 등을 새겨 부산진성 내에 세운 것이었다. 권이진은 이 비석 옆에서 만세덕을 위한 제사를 지내려고 했던것이다. 이후 1764년(영조 40)에 부임한 강필리가 같은 위치에 작은 단을 쌓고 만공단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넣은 작은 비석을 세웠다. 이때 이후 동래부사가 만공단의 제사를 주관한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조선 후기의 글과 그림에 남아있는 다양한 기록으로 만공단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김해 지역으로 유배와 지내던 이학규(李學逵)[1770~1835]는 만공단 옆에 세워진 만공기공비(萬公紀功碑)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동래 화원 이시눌(李時訥)이 1834년에 그린 「임진 전란도(任辰戰亂圖)」와 「부산진 지도(釜山鎭地圖)」에는 부산진성 내에 한자로 만공단의 세 글자가 새겨진 비석, 즉 만공단비(萬公壇碑)가 묘사되어 있다.
[형태]
만공단의 형태를 알려주는 기록은 '작은 단을 쌓았다'는 것만 존재하여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다. 만공단비는 현재 반파된 채로 남아있는데, 가로 36cm, 세로 45cm의 비석 형태이다.
[현황]
조선시대 대일 외교사절단인 통신사[1811년 정사(正使) 김이교(金履喬)]의 일원이었던 군관 유상필(柳相弼)[1782~?]이 대마도에 다녀와서 쓴 일기인 『동사록(東槎錄)』에는 조선을 떠나기 전인 1811년 3월에 만공단에 다녀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문집에는 1811년 8월에 만공단을 방문하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이로 보아 조선 후기에는 만공단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만공단은 일제강점기에 전차 선로 부설과 매축 공사 등으로 인해 크게 훼손되어 그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80년 한 시민이 부산진성 공원에 있는 승가정 앞 화단 경계석 중에 한자로 '만공(萬公)'이라고 새긴 돌이 있다는 사실을 신문사에 제보하였다. 부산시는 이 돌을 만공단과 함께 세운 비석인 만공단비로 추정하여 부산박물관 조선실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부서진 비석 뒷면에는 "숭정기원후사신(崇禎紀元後四辛)"'이라고 적혀 있다.
[의의와 평가]
만공단과 만공단비는 후대의 조선인들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지원하였던 명나라의 전공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또한 무심히 지나쳤다면 화단 경계석으로 남아있었을 중요한 문화재가 시민의 제보 덕분에 우리의 품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역사 기록과 그림을 근거로 상상에만 그쳤던 만공단과 만공단비가 실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줌은 물론 이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