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01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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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槎上錄 |
영어음역 | Sasangnok |
영어의미역 | 1593 Collection of Poems in Japan |
이칭/별칭 | 『김동명사상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한태문 |
[정의]
1636년 김세렴(金世濂)이 통신 사행 부사로 부산을 출발하여 사행 도중에 지은 시를 모은 책.
[개설]
1636년(인조 14) 통신 사행에 부사로 참여한 김세렴은 이전 사행원들처럼 자신의 사행 체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하나는 매일 매일의 여정을 일기 형식으로 적은 『해사록(海槎錄)』이고, 또 하나는 여정에서 느낀 소감을 시로 기록한 『사상록(槎上錄)』이다. 그 가운데서도 『사상록』은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통신 사행의 기록 중 현존하는 최초의 시문집으로, 사행원과의 창화(唱和)는 물론 일본인과의 창화 내용 등을 폭넓게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의 견문도 충실히 담아내고 있어 사행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크다.
[저자]
김세렴(金世濂)[1593~1646]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이다. 아버지 통천 군수 김극건(金克鍵)과 어머니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 허봉(許篈)의 딸인 양천 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이름을 날린 김세렴은 1614년 22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6년 24세 때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조 좌랑과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를 겸임하였다.
이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과 지제교(知製敎)를 거쳐, 1617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지만 인목 대비 폐위 주장자를 탄핵하다가 곽산(郭山)에 유배되고 1년 뒤에 강릉으로 옮겨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기용되어 풀려나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황해도 관찰사, 동부승지, 병조 참의, 부제학, 대사헌 겸 홍문관 제학, 도승지, 호조 판서에 이르렀다.
『근사록(近思錄)』, 『소학(小學)』, 『성리자의(性理字義)』, 『독서록(讀書錄)』 등의 간행에서 엿볼 수 있듯 만년에는 경서 연구에 전력하였다. 경연(經筵)에서는 상세하고 곡진한 설명으로 조리에 맞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문장은 안향(安珦)의 신도비를 지을 정도로 법도에 맞고 품격이 있어 김류(金瑬)는 ‘학사다운 모습을 지닌 인물[學士樣子]’로, 정경세(鄭經世)는 ‘당대 제일의 인물’로 칭송하였다.
1646년 1월 17일 병으로 죽으니 향년 54세였다. 부인은 유희발(柳希發)의 딸인데 자식 없이 일찍 죽었고, 후부인인 병조 참판 유성민(柳成民)의 딸과의 사이에 김익상(金翊相)·김필상(金弼相)·김준상(金儁相) 등 세 아들과, 이가우(李嘉雨)·신상(申晌)에게 시집간 두 딸이 있다. 저서로는 『동명집(東溟集)』, 『동명해사록(東溟海槎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으로,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본평리 본복 마을 뒷산에 있으며 그 길목에 허목(許穆)이 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편찬/간행 경위]
통신 사행을 수행한 사행원들 가운데 문재(文才)가 뛰어난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행록을 남겼다. 그 바탕에는 사행 참여에 대한 긍지와 소중한 체험에 대한 보고 의식 그리고 문학적 능력의 과시 등이 깔려 있었다. 1636년 통신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정사 임광(任絖)은 『병자 일본 일기(丙子日本日記)』를, 종사관 황호(黃㦿)는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부사 김세렴 역시 이와 같은 분위기를 이어가되 일기 형식의 사행록인 『해사록』과 시집 형식의 『사상록』으로 나누어 편집하였다. 조엄(趙曮)이 엮은 것으로 보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행총재(海行摠載)』와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엮은 『해행총재』,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엮은 『국역 해행총재(國譯海行摠載)』에 모두 수록되어 오늘날에 전하고 있다.
[형태/서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은 1책의 필사본으로, 크기는 27.8×19.2㎝이다. 사주 단변(四周單邊)에 반곽(半郭)이 21.5×15.7㎝이다. 행자 수는 10행 28자이다. 주석은 쌍행(雙行)이다. 상이엽화문어미(上二葉花紋魚尾)를 가지고 있다. 『김동명사상록(金東溟槎上錄)』이란 이름으로 『해행총재』 15권에 수록되어 있다.
『사상록』은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에 소장된 『동명선생집(東溟先生集)』 권4 시(詩)에도 실려 있는데, 10권 6책, 부록 1책 등 총 7책이다. 도활자본(陶活字本)으로, 크기는 30.0×18.6㎝이다. 상하 단변(上下單邊) 좌우 쌍변(左右雙邊)에 반곽(半郭)이 21.1×13.6㎝이다. 계선(界線)이 있으며, 행자 수는 10행 20자이다. 주석은 쌍행이다. 상하내향이엽화문어미(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를 가지고 있다.
[구성/내용]
『사상록』은 김세렴의 시에 이식(李植)이 비평을 붙인 것으로, 크게 통신 사행 도중 김세렴이 지은 시와 타인의 서발(序跋)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김세렴이 지은 시는 5언, 6언, 7언, 요체(謠體) 등 약 122제 226수로, 율시와 고시 등 장편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는 대체로 여정에 대한 묘사와 소회를 담는 사행시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서발은 1637년 이식이 지은 「제동명사상록후(題東溟槎上錄後)」와 권칙(權侙)의 「동명사상시집서(東溟槎上詩集序)」, 1638년 신익성(申翊聖)이 쓴 「제동명사상록(題東溟槎上錄)」, 1639년 김시국(金蓍國)이 쓴 「제동명사상록(題東溟槎上錄)」 및 작자 불명의 「동명사상시집서(東溟槎上詩集序)」로 이루어져 있다. 김세렴이 통신 사행에 참여해 남긴 일기인 『해사록』에 의하면, 도일(渡日)을 위해 9월 5일 동래에 도착하여 10월 6일 대마도를 향해 출발하였고, 이듬해인 1637년 2월 25일 부산에 도착해 2월 26일 서울로 출발한 것으로 나타난다.
『사상록』에 전하는 부산 체류 때 지은 시로는 이문학관(吏文學官) 권칙의 시에 차운한 「부산차권학관운(釜山次權學官韻)」, 「차권학관운(次權學官韻)」, 「차권학관운정상사(次權學官韻呈上使)」와 외종제인 허대에게 준 「차외종제허대운(次外宗弟許대韻)」, 「유별외제용권학관운(留別外弟用權學官韻)」 등이 있다. 이 시들은 한결같이 도일을 앞두고 사명을 받은 긍지와 소명 의식, 이별에 대한 아쉬움 등이 묻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부산에 대한 묘사는 ‘먼 산에 안개 걷히매 봉우리 우뚝 솟아났고/ 포구 가득 밀물이 들어와 땅이 둥둥 뜨려 하네[遙山霧歇峯如抃 極浦潮平地欲浮]’, ‘겹겹 물은 대지를 두루 감싸고/ 큰 파도는 옛 성을 뒤흔드네[積水㴠坤軸 洪濤撼古城]’라는 시구에서 볼 수 있듯 바다와 물의 도시로 형상화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이후 행해진 통신 사행록 가운데 온전히 시를 통해 여정을 기록한 최초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는 시작(詩作)에 뛰어났던 김세렴의 의도적인 시도로 바로 뒤를 이은 1643년 통신 사행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곧 부사 조경(趙絅)은 몇 편의 산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시로 이루어진 『동사록(東槎錄)』을 지었고, 종사관 신유(申濡) 역시 오로지 시만으로 이루어진 『해사록』을 지었다. 또 중간에 이식이 이들 시에 대한 비평을 달아 둠으로써 비평사에서의 의의 역시 간과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