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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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山朴氏 |
영어의미역 | Juksan Parksi|Juksan Park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연지 |
[정의]
박기오를 시조로 하고, 박천추를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박씨(朴氏)의 본관은 문헌에 300여 본이 전해지고 있으나 시조가 분명하게 밝혀진 성씨는 대략 70본 안팎이다. 모든 박씨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유일조(唯一祖)로 받들고 있다.
[연원]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시조 박기오(朴奇悟)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넷째 아들인 죽성 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이다. 그는 고려 초에 공을 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保三重大匡)으로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가 뒤에 죽주백(竹州伯)에 개봉되고,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 죽주가 죽산으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본관을 죽산으로 하게 되었다. 죽산 박씨의 세계는 박기오의 후손에서 철성백파(鐵城伯派), 찬성공파(贊城公派), 태복경파(太僕卿派), 문광공파(文匡公派) 등의 4파로 크게 갈린다.
[입향 경위]
박천추(朴天樞)[1569~1633]는 1588년(선조 21)에 남평 문씨(南平文氏)와 혼인하여 성주(星州)에서 동래 북면에 들어왔다. 박천추는 24세 때 부산진성이 왜구에게 함락당하고 이어 동래성에 몰려들자 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과 합류하여 싸웠으나 마침내 성이 함락되어 성벽을 넘어 소산역(蘇山驛)[현 선동 하정]으로 달려가 그곳으로 모여든 힘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이 끝난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작(勳爵)되어 판관(判官)에 증직(贈職)되었다.
[현황]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죽산 박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죽산 박씨는 2,121가구에 6,889명[남자 3,615명, 여자 3,274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죽산 박씨는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두구동, 남구 대연동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특히 대연동 죽산 박씨 문중은 대연정보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관련 유적]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 6동에 있는 죽산 박씨 문중의 주산재(珠山齋)는 박천추를 모시고 있다. 그 외 금정구 구서동의 영추재가 있고, 대연정보고등학교 뒤쪽에 박천추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