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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345
한자 大淵洞竹山朴氏世居地
영어의미역 Daeyeon-dong Juksan Park Clan Hometow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영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30가구
개설 시기/일시 1683년 - 박대수(朴大樹)가 지금의 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에 있던 아버지 박천추의 묘를 대연동으로 이장하며 입향
세거지 대연동 죽산 박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못골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에 있는 죽산 박씨 세거지.

[개설]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 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寄悟)를 중시조로 한다. 고려 태조(太祖) 때 삼한 벽상 공신 태보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保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죽산(竹山)을 하사받은 이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죽산 박씨는 직제학공파, 문헌공파, 문정공파, 전서공파, 대사헌공파,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 목사공파, 총제공파(摠制公派), 찬성공파로 크게 나누어진다. 대연동 못골 마을 죽산 박씨는 총제공파 후손들이다.

[명칭 유래]

옛날 황령산 골짜기는 남쪽에서 동쪽으로 지형의 경사가 높아서 비가 오면 그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흐르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에 세 개가 있었다. 그래서 못을 나타내는 한자인 지(池) 또는 연(淵) 가운데 못 지(池)와 골짜기 곡(谷)이 붙어 지곡(池谷)[일명 못골]이라 불렸고, ‘클 대(大)’ 자와 ‘연(淵)’ 자가 합하여 지금의 대연동(大淵洞)으로 부르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죽산 박씨 부산 입향조인 박천추(朴天樞)는 충정공(忠貞公) 박기오(朴奇悟)의 후손이며 예조 판서 박곤(朴坤)의 8세손으로, 조선 전기 경상북도 성주에서 동래 북면으로 들어왔다. 임진왜란 후인 1683년(숙종 9) 박천주의 첫째 아들 박대수(朴大樹)가 소산역[지금의 금정구 선동 하정 마을]에 있던 박천추의 묘를 대연동으로 이장하면서 이거하였다.

박천추는 동래 향교(東萊鄕校) 교생(校生)이던 24세 때 임진왜란을 맞아 동래성에서 부사 송상현(宋象賢)을 도와 왜적에 항전하였다. 동래성이 함락당한 뒤에도 의병을 일으켜 7년 전쟁 동안 적을 무찌르며 포로가 된 백성을 구출하거나 적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워 선무 원종공신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학문에 정진하며 고을의 풍속을 순화하는 데 온 힘을 다하여 동래 충렬사에 향사되었다.

박대수 이후로는 박경승(朴慶昇)이 유행(儒行)으로 실천의 학문을 이루어 고을 수재들과 강학하며 이름을 날렸고, 동래 향교 유계원(儒契員)으로 기록된 박수언(朴秀彦)[1855년생, 자 양일(兩溢)], 박계하(朴啓夏)[1864년생, 자 윤화(允和)], 박정하(朴禎夏)[1868년생, 자 윤익(允益)], 박현탁(朴鉉鐸)[1865년생, 자 유서(有瑞)], 박진봉(朴鎭琫)[1887년생, 자 정희(正禧)] 등이 있다. 또 자손으로 손자 박호(朴浩)[향안에 실려 있음], 박전해(朴銓海)[1852년생, 대연동 지곡 거주], 박지수(朴志洙), 박여홍(朴余洪), 박규홍(朴奎洪), 박창순(朴昌舜)[대연동 지곡 거주], 박진간(朴鎭干), 박수일(朴壽一), 박장윤(朴璋允)[전포 거주], 박일룡(朴一龍), 박윤룡(朴允龍)[문현 거주] 등이 있다.

[자연 환경]

대연동황령산의 연주봉과 바람 고개 사이 완만한 분지에 자리 잡은 마을로, 옛날에는 골짜기에 빗물이 고이는 못이 있었다고 한다. 1930년 일제가 수리 조합을 만들고 옛날의 못자리 위쪽에 제방을 쌓아 새로운 못을 만들었는데, 남구 토지 구획 정리 계획으로 못은 사라졌다. 현재는 도시화로 북서쪽의 낮은 산지와 남쪽의 우룡산을 제외하고는 평탄화되어 지형적 특징을 확인할 수 없다.

[현황]

죽산 박씨대연동에 세거한 지는 500여 년이 된다. 1904년 발간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는 못골[대연동]에 죽산 박씨 12가구가 살았다. 광복 당시에는 50가구가량 살았으며, 현재는 30가구가 살고 있다. 부산 전역에는 100가구 정도의 후손이 거주한다.

1973년 6월 박천추의 후손들이 선조의 애국정신과 뜻을 기리려고 문중 법인인 ‘인묵재학원’을 설립하였다. 1976년 황령산 연주봉 기슭 묘소 부근 임야 1만 9800㎡[6,000평]에 교지를 마련하여 현재의 대연정보고등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부산 지역에서는 유일하게 문중이 건립한 학교 육영 사업이다. 학교 옆에 문중 재실인 주산재(珠山齋)를 지어 매년 10월 제향을 지내며, 인묵재 추모비를 세워 조상의 충렬을 기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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