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9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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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姜氏 |
영어의미역 | Jinju Gangsi|Jinju Ga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현라 |
[정의]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강위민을 입향조로 하는 부산 지역의 세거 성씨.
[개설]
우리나라 강씨(姜氏)의 시조는 고구려 때 도원수(都元帥)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이다. 이후 강씨는 통일 신라와 고려 중엽까지 문헌이 실전되어 그 계보를 밝힐 수 없다. 그래서 시조 강이식의 원손을 각각 중시조로 하여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등으로 구분된다.
[연원]
박사공파는 고려 원종(元宗) 박사 강계용(姜啓庸)을 1세조(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2세 강인문(姜引文)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을 몇 차례 드나들었다. 3세 강사첨(姜師瞻)은 충렬왕 때 감찰어사를 지냈으며, 4세 강창귀(姜昌貴)[?~1480]는 판도정란을 거쳐 계림 판관을 했으며, 5세 강군보(姜君寶)[?~1380]는 정당문학, 첨의평리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 삼중대광 상의문하찬성사를 지냈다.
6세 강시(姜蓍)[1339~1400]는 판도판서와 밀직부사, 추중보조공신에 올랐고, 7세 강회백(姜淮伯)[1357~1402]은 이조 판서, 예문관 대제학, 정당문학 겸 대사헌을 했다. 8세 강석덕(姜碩德)[1395~1459]은 대사성, 이조 참판, 개성부 유수, 대광보국숭록대부, 세자사를 지내면서 고려 시대 명문 집안을 자랑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9세 강희맹(姜希孟)[1424~1483]이 조선 전기의 대학자로서 집현전 지제교 겸 경연 사가서당, 정난 익재공신,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지경연 춘추관, 성균관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세자사 등을 지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 『성종실록(成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하는 많은 활동과 공적을 남겼다. 10세 강귀손(姜龜孫)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경연춘추관 상감사, 세자사부 등으로 활동하였다.
11세 강태수(姜台壽)[1479~1526]는 신미 별시에 장원하여 통훈대부 순천도호부사 겸 병마관제사를 하였고, 12세 강복(姜復)[1508~1529]은 군인으로 적순부위, 충좌위 부사용으로 근무 중 22세에 순직하니 모두가 뛰어난 인물을 잃었다고 애통하였다. 13세 강극성(姜克誠)[1526~1576]은 통훈대부, 홍문관 응교 겸 경연 시강관, 춘추관 기주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4세 강세경(姜世慶)은 통훈대부, 장례원 사의를 하였으며, 15세 강진양(姜晉暘)은 부사용을 하였으며, 16세 강윤후(姜胤後)는 충의위 어모장군으로 미수 허목(許穆)[1595~1682]과 이청하(李淸河)와 더불어 강도지란(江都之亂)을 평정하였다. 이렇게 고구려 도원수를 시작으로 고려, 조선 등을 거치면서 많은 인물을 배출한 명문 집안이다.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姜民瞻)[963~1021]을 중시조로 한다. 강민첨은 963년(광종 14)에 진주에서 태어났다. 현종 때 동여진(東女眞)이 영일과 청하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또 강민첨은 1018년(현종 19) 거란군이 고려를 침입하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거란의 장군 소배압이 군사를 끌고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강민첨은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상서가 되었다.
[입향 경위]
부산의 진주 강씨는 크게 두 개의 파인 은열공파와 박사공파가 입향하였다. 은열공파는 금정구 두구동에서 찾아진다. 고려 말기에 14세 강위민(姜渭敏)이 금정구 두구동으로 이거하였다. 강위민은 은열공파에서 분파된 소윤공파이다. 박사공파로, 동래 쪽으로 들어온 경우이다. 즉 이들은 11세 강심(姜諶)의 후손들이다. 강심은 연산군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밀양으로 귀양 왔다가 사망하자 이곳에 후손들도 눌러 살게 되었고, 그 일파가 동래로 옮겨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기에 그의 증손자인 14세 강사례(姜士禮)가 지금의 삼랑진으로 옮겼다가 동래로 다시 이거하였다. 강사례는 박사공파의 분파인 소윤공파이다.
[현황]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진주 강씨가 세거(世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진주 강씨는 3만 68가구에 9만 8420명[남 4만 9457명, 여 4만 8963명]이 부산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주 강씨는 부산광역시 강서구 대저동, 사상구 학장동, 금정구 두구동 죽전 마을, 기장군 철마면 구칠리, 금정구 장전동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1979년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죽전 마을[마을 뒷산 공덕산 기슭에 대나무가 많다는 것에서 유래] 세거지에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140개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며, 종족들이 회합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