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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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邱洞晋州姜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Jinju Gang Clan in Dugu-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죽전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진주 강씨 세거지.
[개설]
진주 강씨(晋州姜氏)의 시조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 사람으로 병마 도원수(兵馬都元帥)를 지냈다. 영양왕 9년 병마 도원수로 5만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 지방에 출정하였고, 뒤이어 수(隋)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임유관(臨渝關)에서 크게 무찔렀다. 신라 말 대중대부 판내의령(大中大夫判內議令)을 지낸 정순공(正順公) 강진(姜縉)이 진양후(晋陽侯)에 봉해지면서 강이식을 시조로 하고 진주를 본관으로 하였다. 후손 5파가 모두 강이식을 시조로 하며, 은열공파(殷烈公派)와 인헌공파(仁憲公派)는 어느 대에서 분파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각 파조를 기1세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인헌공파는 강이식의 후손이지만 금천(衿川)을 본관으로 하고 있다.
[명칭 유래]
두구동 죽전 마을은 공덕산(孔德山) 서쪽 기슭에 9,917.3㎡[3,000여 평]의 대밭이 있어 죽전(竹田)이라 하였다. 대밭안[竹田內]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진주 강씨 두구 문중은 은열공파에 속한다. 은열공파는 고려 때 강감찬(姜邯贊)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귀주 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친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한다. 강민첨은 963년(광종 14)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났다. 현종 때 동여진(東女眞)이 영일과 청하로 쳐들어오자 도부서(都部署)의 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였다. 또 1018년(현종 9) 거란군이 침입하자 강감찬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패배한 소배압의 군사가 다시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이 되고 일등 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이듬해 지중추사 병부 상서가 되었다. 14세 강위민(姜渭敏)이 고려 말 동래 북면 두구동 죽전 마을에 입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두구동 진주 강씨 집안에서는 효자를 배출하였는데 강위민의 아들 강연방(姜連芳)의 고손이며, 강세주(姜世柱)의 아들인 강성구(姜聖耈)이다. 『포창 완의문(褒彰完議文)』에 의하면 1924년 서울에서 공부자 사당을 짓고 『오륜 행실록(五倫行實錄)』을 편찬할 당시에 경상남도 유림의 추천으로 이 효행록에 실려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에 국도 제7호선 금정구 두구동 입구에 ‘효자 강성구지려(孝子姜聖耈之閭)’ 비각을 만들어 세웠고, 1973년에 다시 만들어 세웠다. 1991년 도로 확장으로 효자 비석을 금정구 두구동 죽산 마을 영모재 내로 옮겼다. 1992년에 또 비를 만들어 세우면서 이전에 세웠던 비석 2기는 방치되어 있다.
[자연환경]
두구동 죽전 마을 동쪽에 공덕산이 있고, 마을 안에는 연꽃 소류지로 유명한 조정언(調丼堰)[2,644.62㎡ 규모의 저수지로 1887년 축조]이 있다.
[현황]
1979년 진주 강씨 문중에서 두구동 죽전 마을 세거지에 영모재(永慕齋)를 건립하여 140개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리며 종족이 모여 회합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2013년 현재 진주 강씨는 14대째, 1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