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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산동 사암 마을 밀양 박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9185
한자 菉山洞四岩-密陽朴氏世居地
영어의미역 Daejeo-dong Milyang Bak Ancestral Village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상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세거지 녹산동 사암 마을 밀양 박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녹산동에 있는 밀양 박씨 세거지.

[개설]

박씨(朴氏)의 세계(世系)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증손인 신라 제5대 파사왕과 제7대 일성왕에서 갈라졌는데, 파사왕계는 뒤에 영해(寧海)·면천(沔川)·강릉(江陵) 등으로 분관하였고, 비안(比安)·우봉(牛峰)·이산(尼山)·해주(海州) 등으로도 갈라져 나왔다. 한편 일성왕계는 25세인 신라 제54대 경명왕과 제55대 경애왕 대에서 다시 갈라져, 경명왕계는 아들 9형제에서 각기 첫째 아들 박언침의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밀양 박씨·반남 박씨·진원 박씨 등], 둘째 아들 박언성의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고령 박씨], 셋째 아들 박언신의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함양 박씨·삼척 박씨 등], 넷째 아들 박언립의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죽산 박씨·음성 박씨·고성 박씨], 다섯째 아들 박언창의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상주 박씨·충주 박씨], 여섯째 아들 박언화의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전주 박씨·무안 박씨], 일곱째 아들 박언지의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순천 박씨·춘천 박씨 등],여덟째 아들 박언의의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경주 박씨의 8대군파], 아홉째 아들 박교순(朴交舜)의 국상공파(國相公派)[울산 박씨]로 분파되었다. 한편 경애왕계는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를 이루었다.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에 입향한 향시조는 고려 시대 사헌부 규정(糾正) 박현(朴鉉)의 21세손 박정유(朴禎侑)가 1740년경 양산에서 사암마을로 이거해옴으로써 사암 입향조가 되었다.

부산광역시 강서구에 입향한 밀양 박씨 집안은 판도판각공파[전에는 판도공파라고 하였음]로, 시조는 박천익(朴天翼)이다. 박천익은 시조 박혁거세의 37세손이며, 밀양 박씨의 조상인 밀성 대군의 8세손이다.

[명칭 유래]

사암(四岩) 마을화전리 남쪽 해안에 있는 네 개의 큰 바위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에게 쫓기던 왜적이 화전 끝으로 상륙하려다 큰 바위에 놀라 당황하다가 조선 수군에 쫓겨 간 후 다음에 찾아와서 ‘네가 바위구나’라고 한 데서 여암(汝岩)이라 불렀는데, 선바위·탕건 바위·입 바위·등잔 바위의 네 바위에서 유래한 ‘네 바위’가 옛 이름이다. 남해 바다를 향해 끝끝내 벌어졌다는 데서 “녹산 네 바우 끝이 벌어졌다”라는 전설이 한동안 전국에 유행하였다.

[형성 및 변천]

1720년경 고려 시대 사헌부(司憲府) 규정(糾正) 박현(朴鉉)의 20세손 박익문(朴益文)의 아들 박정유가 양산(梁山)으로부터 녹산(菉山) 사암 마을로 이거(移居)해 정착한 후 290여 년간 세거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마을에 정착한 후 규정공 26세손 박인식(朴仁植)이 성균관(成均館) 경의문대시(經義問對試)에 합격하여 정3품 비서원 승(秘書院丞), 주임관(奏任官)을 역임하였고, 기업인 박차록(朴次菉)은 한얼중학교 이사장 및 교육 사회사업을 펼쳤으며, 녹산면장을 역임한 박명찬(朴明讚), 박용개(朴容凱) 및 시인 박문하(朴文夏)와 박영하(朴英夏) 화백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자연 환경]

사암 마을은 서쪽으로 국수봉(局守峰)이 있고, 동쪽으로 서낙동강이 바다와 만나는 하구에 있는 갯가 마을이었다. 해안가를 따라 1950년대까지는 염전(鹽田)이 발달해 있었고, 선바위·탕건 바위·입 바위·등잔 바위가 있었는데 탕건 바위는 1959년 태풍 사라호 때 제방 복구공사용으로 없어졌고, 선바위는 1995년 녹산 국가 산업 단지 조성 때 없어지고 기념비만 남았다.

[현황]

밀양 박씨 규정공파가 강서구 녹산동 사암 마을에 정착하여 한동안 번창할 때는 20가구 넘게 살았으나, 화전 산업 단지 조성으로 철거되고 난 후에는 2013년 현재 신호 마을과 사암 마을 이주 단지를 합하여 5~6가구가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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