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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 송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539
한자 恩津宋氏
영어의미역 Eunjin Songsi|Eunjin S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부산광역시
집필자 송진모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씨시조 송대원(宋大源)
입향시조 송응지(宋應祉)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525년연표보기 - 송응지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88년연표보기 - 송응지 사망
본관 은진 -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입향지 삼성대 마을 -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지도보기

[정의]

송대원을 시조로 하고, 회덕(懷德)에서 동래로 입향한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송대원(宋大源)의 자는 천지(川至)로, 처음 이름은 송견(宋堅)이었다고도 한다. 고려조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냈고,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 『여산 송씨 세보』에 은진 송씨(恩津宋氏)여산 송씨(礪山宋氏)와 근원이 같아, 여산 송씨의 시조 송유익(宋惟翊)의 아우 송천익(宋天翊)이 은진에 세거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고증할 문헌이 없고, 송천익에서 송대원까지 몇 대인지도 알 수가 없어 후손 송대원을 시조로 삼고 본관을 은진으로 하였다.

송대원의 증손자인 집단공 송명의(宋明誼)가 회덕(懷德) 땅에 은거하면서부터 후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송대원의 5세손 쌍청당 송유(宋愉)는 송계사(宋繼祀), 송계중(宋繼中) 형제를 두었다. 송계사의 아들 송요년(宋遙年)과 송순년(宋順年)이 각각 목사공파(牧使公派)와 정랑공파(正郞公派)로 갈리고, 송계중의 아들은 송미년(宋眉年)과 송호년(宋胡年)으로 각각 주부공파(主簿公派)와 장사랑공파(將士郞公派)로 나뉜다. 이 중 송계사의 후대에서 다시 38파로 갈리며, 또한 별보로 영천공파(榮川公派)가 있다.

송계사의 후예로는 문묘 배향에 송준길(宋浚吉)[1606~1672]과 송시열(宋時烈)[1607~1689], 종묘 배향에 송시열과 송근수(宋近洙)[1818~1903], 서원 향사에 20명 등이 있다. 특히 3송으로 불리는 인물로 송준길, 송시열, 송규렴(宋奎濂)[1630~1709] 등이 있다. 송준길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로서 대사헌·병조 판서·우참찬·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명필로 이름이 났다. 송시열인조 때 36세로 사마시에 장원 급제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효종 때 이조 판서, 현종 때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였는데, 숙종 때 서인이 노·소론으로 갈리면서 노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서울로 오던 중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았다. 송규렴은 대사간·대사헌·동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송계중의 후예로는 동지중추부사 송인수(宋仁壽), 사과(司果) 송예수(宋禮壽), 임진왜란 원종공신 2등훈인 송응현(宋應賢)과 송걸(宋傑) 등이 있다. 부산에 입향한 가문은 송인수 계통이다.

[입향 경위]

동지중추부사 송인수(宋仁壽)의 아들인 12세 송응지(宋應祉)가 충청도 회덕에서 동래 삼성대(三姓臺)[지금의 지하철 동래역 부근]에 들어와 입향조가 되었다. 이들이 장사랑공파의 후손이다. 16세기 후반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래 삼성대에서 재송으로 가게 되었는데, 입향한 사람은 송응지의 아들인 송종조(宋宗祚), 송수경(宋守卿)이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 송수경의 후손들이 주로 재송동에 계속 거주하였다. 송수경은 증손인 송영민과 송계민을 두었다. 송영민의 후손 중에는 동래부청, 무청에 출입하여 장관청 중군 등을 역임하였으며, 송계민의 아들 송초건(宋楚健)은 훈련원 판관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송준방(宋俊芳), 송준호(宋俊豪), 송준업(宋俊業), 송준평(宋俊枰) 등이다. 송준방은 동래 동면 재송동에, 송준호는 울산 금단리에, 송준업은 동래 북면 남산동으로, 송준평은 울산으로 이거하게 되었다. 동래 동면 재송동에서 자리 잡은 후손들은 주로 동래부청, 무청에 출입하여 훈련원 판관, 장관청 중군, 교련청 교련관, 별군관청 대솔군관, 별기위청 영하 등이 배출되었다.

또 12세 송응손(宋應遜)은 회덕에서 동래 장산 아래[지금의 해운대구]에 들어왔다. 그의 후손들은 거제, 주례, 기장 등지로 갈라져 살게 되었다. 후손 중 동래 향안에 송희정(宋希程), 송휘(宋徽), 송창은(宋昌殷)이 입록되어 있으며, 기장 향안에 송시은(宋是殷)이 있다. 그리고 송응규(宋膺奎)는 경진과제진사 겸 오위장중추부사(庚辰科第進士兼五衛將中樞府使)를 지냈다. 송응규의 직계 후손은 금정구 남산동에 세거하고 있다.

12세 송창문(宋昌文)은 회덕에서 동래 대연동에 들어왔다. 송창문의 5세손 송규상(宋奎祥)은 『포충속후록』을 받았다. 송규상과 송규성(宋奎晟)의 후손들은 대연동[남구]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5세손 송두병의 후손들은 동래구 안락동[호현리]에서 세거하고 있으며, 5세손 송두한은 양정에 살다가 구서동[금정구]으로 이거하여 9대째 세거하고 있다. 6세손 송경인(宋景仁)은 기장 하북면 평전리에서 살았으나 지금은 동래 만덕에서 세거하고 있다.

13세 송국조(宋國祚)는 첨사공파로, 그의 아들 송시호(宋時豪)와 같이 회덕에서 정관읍 달산리로 왔다. 이곳에서 수대로 세거하여 왔으나 이 지역이 정관 신도시 개발 지역으로 편입되어 대부분 구연동 마을[지금의 정관읍 매학리]로 집단적으로 이거하고, 일부는 인근 지역으로 옮겨가 살고 있다.

은진 송씨 삼가공파의 후손들은 울산부에서 동래부 서상면 금산리로 와서 수대를 걸쳐 살다가 1891년부터 북면 선동에 거주지를 옮겨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21세 송흠기(宋欽基)는 우암문정공파로, 동래 북면 남산리에 들어왔다.

은진 송씨 동춘당문정공파의 후손 17세 양흠(陽欽)은 회덕에서 동래 남천동으로 와서 5형제를 두었는데, 감천·암남·운촌·서천·영도·민락·기장 등지에서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은진 송씨 송남수(宋枏壽)의 후예 21세 송헌배(宋憲培)는 회덕에서 동래 부산으로 왔으나, 이 후손들의 세거지는 알 수가 없다.

이 가운데 입향 경위를 알 수 있는 문중은 첨사공파의 송시호(宋時豪)의 가계이다. 송시호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사한리에서 출생하여 시사 사복시판사(始仕 司僕侍判事)로 재임 중인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의병을 조직하고 군량을 확보하여 악전고투 중 남한산성에서의 강화 소식에 접하고 스스로 벼슬을 버리고 북향 사배를 올린 후 기장으로 오게 되었다. 다른 문중은 입향 경위를 자세히 알 수가 없다.

[현황]

은진 송씨는 부산 시내 여러 곳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구서동·선동, 남구 대연동, 북구 만덕동, 기장군 정관읍 매학리 등지이다. 현재에도 이 가운데 여러 곳이 세거를 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적인 명문 가문이다. 2000년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은진 송씨는 부산에 총 6,611가구 2만 1,454명[남 1만 845명, 여 1만 609명]이 살고 있다고 되어 있다.

[관련 유적]

송응지의 유적으로 동래 삼성대 마을에 마을 표지석이 있고,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재송동에 재송재(栽松齋)가 있으며, 재실 내에 ‘삼성공 영적비’와 ‘재송재 건립 기념비’가 있다. 송응손의 유적으로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답곡리 603번지에 치상재(致祥齋)가 있고, 송금조의 동상이 부산대학교 본관 앞에 있다.

송창문의 유적으로 묘소가 금정구 선동 신천 마을 뒷산에 있으며, 배위 묘소는 금정구 구서동 태광산업 뒷산에 있다. 동래 충렬사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임진 24공신 공적비’가 충렬사 경내에 있다. 고문서로 『포충속후록』, 『충렬사지』, 교지 등이 있다. 송시호의 유적으로 향모사, 서호재가 기장군 장안읍 덕선리 내덕 마을 입구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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