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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리 남평 문씨 세거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7505
한자 龍岫里南平文氏世居地
영어의미역 Residential Place of Nampyeong Mun Clan in Yongsu-ri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진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세거지
가구수 3가구
세거지 용수리 남평 문씨 세거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남평 문씨 세거지.

[명칭 유래]

용수리는 1914년 덕전동과 산막동평전동·가동을 통폐합하여 붙인 명칭으로,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4개 마을이 모두 조룡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조룡산의 ‘용(龍)’ 자와 산부리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뫼부리 수(岫)’ 자를 합하여 붙인 이름으로 추정한다.

[형성 및 변천]

남평 문씨(南平文氏) 중시조는 고려 숙종(肅宗) 때 사람인 문익(文翼)이고, 공민왕(恭愍王) 때 사간원 좌정언으로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갔다 오면서 목면을 전래한 충선공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은 9세손이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평(文苹)이 당시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낙향하니, 바로 남평 문씨 의안공파 동래 문중입향조다. 이후 20세 문세휘(文世輝)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하여 선무원종 공신에 녹훈되었고, 통정대부 병조 참의에 증직되어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초 21세 문성질(文成質) 대에 지금의 용수리로 이주하였으며, 22세 문유강(文有鋼)·문유서(文有緖) 이후 후손이 번창하였다.

[자연 환경]

용수리 북동쪽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병산리에서 발원한 좌광천이 이곳을 지나 동쪽으로 흐른다. 좌광천 주변으로 평지가 나타나 농경지로 이용되었으나, 현재는 정관 신도시 개발로 일부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현황]

그 동안 용수리 일대에 남평 문씨 14가구가 세거하였으나 정관 신도시 조성 여파로 대부분 흩어지고 2013년 현재는 용수리 가동 마을에 3가구가 살고 일부는 인근 정관읍 일대로 흩어졌다. 문유강의 아들 23세 큰아들 문한영(文翰英)의 자손들이 달산리에 있던 제실 강변제를 병산리로 옮겼다. 문유강의 셋째 아들 23세 문한빈(文翰彬)의 자손들도 용수리 덕전 마을에 있던 제실 운용제 부지가 정관 신도시에 편입되자 정관읍 양수길 11로 옮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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