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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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杜邱洞竹山朴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Residential Place of Juksan Bak Clan in Dugu-dong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 대두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진모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두구동에 있는 죽산 박씨 세거지.
[개설]
죽산 박씨(竹山朴氏)의 시조는 박혁거세(朴赫居世)이며,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아들인 죽성 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아들 박기오(朴寄悟)가 중시조다. 고려 태조(太祖) 때 삼한 벽상 공신 태보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太保三重大匡)에 올라 죽주백에 봉해지고 식읍으로 죽산(竹山)을 하사받은 이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명칭 유래]
옛날 두구동(豆口洞) 지역에서는 밭농사를 주로 하여 콩을 많이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처음에 대두(太豆), 후에 태두(太荳) 마을이라 불렀으며, 다시 대두(大豆)로 부르게 되었다. 두구동(豆口洞)의 동구(洞口)에 해당하는 마을로 초기 두구동은 대두(大豆)에서 지칭된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두구동(豆口洞) 대신 두구동(杜邱洞)으로 사용하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죽산 박씨는 크게 직제학공파, 문헌공파, 문정공파, 전서공파, 대사헌공파, 별장공파, 제학공파, 충현공파, 목사공파, 총제공파, 찬성공파로 나누어진다. 구서 문중은 총제공파로 총제공 박덕공(朴德公)에서 시작되었다. 박덕공은 고려가 멸망할 것을 예견하고 광릉산(光陵山)으로 은둔하였는데, 후일 조선 정조(正祖) 때 개성 두문동(杜門洞) 표절사(表節祠)에 모셔졌다. 박덕공의 5세손 박수(朴燧)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성주(星州)로 가게 되어, 박수의 현손 인묵재(忍黙齋) 박천추(朴天樞)는 어릴 적 성주에서 자랐다. 이후 박천추가 동래로 이거하여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박천추는 임진왜란 때 동래 향교(東萊鄕校) 교생으로 분연히 창의하여 사람들에게 충의를 일깨우고 나라에 공훈을 세워 동래 충렬사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박천추의 손자 의재공(毅齋公) 박준(朴浚)이 동래 대연동에서 동래 북면 구서동으로 이거하여 구서 문중의 입향조가 되었고, 박준의 증손자 박우곤(朴宇坤)이 구서동에서 동래 북면 두구동 대두 마을로 들어와 두구 문중의 입향조가 되었다. 박우곤의 아들 박경승(朴慶昇)은 1937년에 간행된 『동래군지』 유행(儒行) 편에 입록되어 있다.
[자연 환경]
두구동 대두 마을 입구에 솔밭이 있으며, 대두 마을 쪽으로 흘러내리는 수영강을 국실천이라 부르는데 이는 마을 서쪽에 국실산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고 있다. 마을 형상이 배 모양을 닮아 배설이라 불렸으며, 예로부터 우물을 파면 그 집이 망한다고 하여 4곳의 공동 우물을 이용하였다. 마을 동쪽에 있는 수영강 사이 평지는 전답으로 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