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73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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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堂甘洞驪陽陳氏世居地 |
영어의미역 | Danggam-Dong Yeoyang Jin Family Line Village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류종현 |
[정의]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었던 여양 진씨 세거지.
[개설]
여양 진씨(驪陽陳氏)는 본래 중국 성씨로서 송(宋)나라 때 우윤(右尹)을 지낸 진수(陳琇)가 국란(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건너와 여양현, 곧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덕양산 아래에 정착 세거하였다. 그의 후손인 진총후(陳寵厚)가 고려 인종(仁宗) 때 신호위 대장군(神號衛大將軍)을 지내고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여양으로 하였다. 이 후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진화(陳澕), 조선 명종 때의 진식(陳寔), 임진왜란·정묘호란 때 공을 세운 진무성(陳武晟) 등이 유명하다.
영남 지방에서는 밀양, 고성, 합천 지방에 비교적 많은 숫자가 살고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시중공파의 후손 중 송재(松齋) 진한준(陳漢遵)과 진한언(陳漢彦) 형제가 의병에 참여함으로서 위기를 겪었는데 형인 진한준이 청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쳐부수며 남하하여 합천 악견산(岳堅山)을 거점으로 전투를 계속하다가 초계 진중에서 순절하였다. 당시 밀양에 살던 그 아들 진의(陳誼)가 아버지 묘소와 사당을 밀양에 모시고 자손들도 그대로 밀양에 세거하였다. 그 후 진정기(陳廷起), 진찬(陳璨), 진필선(陳必善), 진세경(陳世經), 진응관(陳應瓘)으로 이어져 왔다.
[명칭 유래]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의하면, 당감동이란 이름은 일제 강점기인 1924년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당리(堂里)와 감물리(甘勿里) 두 마을을 합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원래 고무나무골이라 불렀는데, 마을 가운데 수령이 오래된 고사목(枯死木)이 있었는바 이를 중심으로 북쪽을 당리, 남쪽을 감물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당리라는 이름은 오래된 당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영숙사(永肅祠)’라는 신당이 남아 있다. 감물리는 이 마을을 흐르던 검물내[神川, 神水]가 변한 이름이라는데, 지형적으로 보아 지금 부산천의 옛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형성 및 변천]
진응관의 둘째 아들이 진경창(陳慶昌)이고, 진경창의 셋째 아들이 진의혁(陳宜赫)이다. 진의혁의 아들인 진상수(陳尙修), 진상욱(陳尙旭) 형제가 조선 헌종(憲宗) 후기인 1850년대 동래로 이거하여 당감동에 들어왔다. 1904년 발간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도, 1934년의 『조선의 성(姓)』에도 당감동에 진양 진씨가 세거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 이후 약간의 호구가 이거하여 산 것으로 보인다.
[자연 환경]
당감동 서북쪽은 금정산맥이 지나가는 산지로, 이 지역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산지의 동쪽 산록에서 발원한 소하천은 동천의 상류로 동남쪽으로 흘러 동천으로 유입한다.
[현황]
2000년 인구 조사에서는 당감동에 여양 진씨 1,400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나 2013년 현재는 세거 흔적을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