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백화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3827
한자 白化堰
영어음역 Baekhwa-eon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금련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수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제언
관련문헌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내영지(萊營誌)』|『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
비정 지역 백화언 비정 지역 - 부산광역시 남구 금련산 일대

[정의]

조선 후기 동래부 남촌면에 있던 제언.

[명칭 유래]

백화언(白化堰)에 대한 정확한 명칭 유래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지역에 백운포, 백운 고개 등 ‘백’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이 있다. 이 지역은 수심이 깊어 운무가 끼어 있어 이런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형성 및 변천]

백화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 제언조이며 남촌면(南村面)[현 부산광역시 남구]에 소재하였다고 전한다. 그 위치는 『내영지(萊營誌)』[1850]에서는 “본영 남쪽 5리[약 2㎞]”로 『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1868]에서는 “부 남쪽 10리[약 4㎞]에 있다”고 전하고 있다.

백화언은 둘레 약 118.18m[390척]로 소규모인 데 비해, 수심이 약 3.94m[13척]로 제방 길이에 비해 수심이 깊은 전형적인 산곡형(山谷形) 제언이다. 산곡형 제언이란 하천 상류나 고지대의 골짜기에 제방을 건설하는 방식이다. 주로 평균 약 1.82m[6척] 규모의 경상도 지역 제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백화언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부산광역시 남구에 있는 황령산이나 금련산 아래에 당곡 마을, 용소 마을 등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마을의 취수나 농경지 경작을 위해 설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백화언은 1906년 일제가 수리 조합 조례를 발표하고 이어서 궁방이 관리하는 수리 시설 대부분을 국유화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 근대적 저수지가 등장하면서 용도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남촌면은 지금의 부산광역시 남구 일대이고, 동래부와 경상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각각 10리와 5리 지점이다. 따라서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백화언의 소재지는 금련산 산줄기 일대로 볼 수 있다.

[관련 기록]

『내영지』에 “백화언은 본영 남쪽 5리에 있다[白化堰在營南五里]”, 『동래부 사례』에 “백화언은 동래부 남쪽 10리에 있다. 방죽의 둘레는 390척, 물 깊이는 13척이다[白化堰在府南十里 周三百九十尺水深十三尺]”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