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38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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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堤堰 |
영어음역 | Je-eon |
이칭/별칭 | 보,방축,언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김수한 |
[정의]
전근대 시기 부산 지역에서 농업용수를 저수하기 위해 축조된 제방과 방죽.
[제언의 등장]
우리 역사에서 농업은 전근대 사회를 통틀어 국정(國政)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수리 시설의 개설과 유지·보수는 정책의 우선순위를 차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가운데 제언은 벼 재배와 불가분의 관계인만큼 그 등장 시기 역시 수산제, 벽골제로 대표되는 삼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언에 대한 기록이 증가하는 것은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고대 국가를 형성한 삼국이 미곡을 조세의 대상으로 삼은 시기와 일치한다. 따라서 쌀 재배 면적의 확산과 생산량 증가는 국가뿐만 아니라 토지 소유자 및 생산자 모두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그 결과 통일 신라에서는 인공 제언을 통해 농업용수를 공급받는 ‘오답(奧沓)’이 등장했다. 이러한 전통은 고려 시대로 계승되어 시지(柴地), 산전(山田)이 개간되었고 12세기 이후 수리 관련 토목 기술과 접합되어 고려 후기에는 저습지와 연해지 개발이 가능해졌다.
[조선 전기 동래부의 제언]
고려 말과 조선에 들어 벼농사가 마른 논에 볍씨를 직접 파종하던 시대에서 차차 모를 길러 이앙(移秧)하는 방식으로 바뀜에 따라 수리 시설에 대한 관심은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 제언에 관한 본격적인 기록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전국 군현의 수리 시설 44곳을 기록하고 있지만 동래 지역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반면 태종과 세종대에 적극적으로 추진된 제언 수축의 성과가 반영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동래현의 여섯 군데 제언[마수곡제, 구등죽리제, 용달리제, 죽산리 면주동제, 화지리제, 부고개제]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 동래현은 이들 6곳의 제언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앙법을 실시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전기 부산 지역은 수전이 50%로 전국 평균 28%나 경상도의 수전 비율 40%를 상회하는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조선 전기 부산 지역은 이미 수전 농업이나 관련 수리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부산 지역의 수리 기술을 유추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조선 시대에 편찬된 지리지의 제언조에 각 군현의 수리 시설의 숫자, 규모, 위치 등을 기재하고 있어 부산 지역 제언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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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동래부의 제언]
조선 후기에 들어 비변사에서는 제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해당 지방관의 관리 규칙을 담아 『제언절목(堤堰節目)』[1778]을 제정·시달하였다. 이에 따라 지리지에도 각 지역 제언의 소재지와 규모[둘레, 길이, 폭, 수심]를 명시하기 시작했다. 동래부도 신지언(新池堰), 생천언(生川堰), 건자언(巾子堰) 등 새로운 제언이 축조되어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는 제언의 수가 9곳으로 늘어났다.
부산 지역 제언에 관한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한 것은 『동래부 읍지(東萊府邑誌)』[1832] 제언조이다. 여기에는 기존 9개의 제언 이외에도 신설 또는 중축된 것으로 보이는 제언 11군데를 추가로 싣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수치상의 증가는 제언의 남설과 사점(私占)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고 그 뒤 편찬된 『동래부 사례(東萊府事例)』[1868]나 『경상도여지집성』[1899]에는 원래의 아홉 곳과 어흔언(於欣堰), 백화언(白化堰), 고성언(古城堰) 등 12곳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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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부 제언의 폐지와 특징]
부산 지역의 제언은 1906년 대한제국이 수리 조합 조례를 발표하고 이어서 궁방 등이 관리하는 수리 시설 대부분을 국유화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동래군지』[1937]에 따르면 객달언, 조정언, 초읍언[구 화지언], 연지언[구 신지언] 등 일부가 이 시기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리 조합 주도로 성지곡(聖旨谷) 같은 근대식 저수지가 등장하면서 조선 후기 제언들은 원래의 자리를 내어주고 그 용도가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6·25 전쟁 이후 부산 지역의 인구 증가에 따른 경사지와 저습지의 택지화로 인해 지금은 그 흔적마저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부산 지역에 설치된 제언의 특징은 그 저수 면적이나 규모면에서 전국적 수준에 비해 소규모였다. 이는 조정언 비(調井堰碑)에서 보듯이 제언계(堤堰契) 등 지역 사회의 주도로 제언의 축조와 관리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반면 동래부 차원의 제언 축조는 수리 시설로서가 아니라 낙동강의 범람을 막기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은 평지형 보다는 산곡형 제언이 다수 축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부산 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로 일제 강점기 저수지 역시 그 명칭을 달리했지만 조선 후기 제언의 입지를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