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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12890
한자 平面美術
영어의미역 Two Dimensional Art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양희

[정의]

일본인을 통해 부산에 유입된 근대적 의미의 평면 미술로서 서양화 전개와 현재까지의 흐름.

[개설]

평면 미술은 2차원의 평면에 선, 면, 색채, 명암, 입체감, 공간감 등을 표현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종이, 화선지, 캔버스 등 2차원의 평평한 면에 유화, 아크릴, 수묵, 잉크 등 어떤 재료를 사용하였는가에 따라서 그림을 부르는 명칭이 달라진다. 가령 재료, 형식에 따라 서양화, 한국화, 판화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각이나 설치, 영상 설치 등이 3차원 공간과 연결된 것이라면, 평면 미술은 2차원과 연결된 모든 회화를 통칭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부산의 평면 미술의 기원을 어디에서 잡을 수 있을까? 조선 시대, 고려 시대 이전에도 그림 및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존재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평면 미술이라는 형식과 그것을 그리는 화가는 서구적인 개념이며 근대 이후의 산물로 보아야 한다. 즉 일본을 통한 서구 문물의 도입으로 서구적 의미의 미술[fine art]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는 서구적인 의미의 회화 개념과 공간적으로 부산에 한정한 평면 미술을 다루고자 한다.

[개항기~일제 강점기]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근대적인 의미에서 부산의 평면 미술은 서양화 도입으로 그 기점을 잡을 수 있다. 달리 말해 일본과 조선이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 서구 문물이 도입된 이후의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부산포의 개방이 결정된 것은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조약 이후이다. 그로 인해 부산은 급속하게 변동하게 되는데, 부산항은 전통 도시였던 동래(東萊)와 단절한 채 식민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지역은 용두산을 둘러싸고 있는 대신동남포동 일대, 그리고 세관이 있던 초량을 비롯한 부산진 등이었다.

일본인들은 주거 지역과 상업 지역을 용두산 주변에, 행정 기구를 그 외곽에 배치함으로써 이 일대를 부산의 경제적, 행정적, 문화적 중심지로 삼았다. 개항 직후 거류지에는 대부분 일본인이 살았지만,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거류지를 중심으로 조선인들도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생활 기반을 만들어 갔다. 일본의 문물이 조선으로 유입되면서 근대 식민지의 모습이 만들어졌고, 여러 제도가 들어왔다. 서양화가 들어온 것도 이 시기이며, 미술 제도와 양식이 유입되었다. 미술을 가르치는 장소로 학교를 들 수 있고, 그것을 보급하고 전시하는 형태를 전람회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교육 기관을 살펴보자면 부산에서 일본인 교육 기관으로 1930년대까지 공립 중학교, 공립 여자 고등학교, 공립 상업 전수 학교 등이 설립되었는데, 이 모든 학교에서 도화 과목을 가르쳤으며, 대부분의 도화 교사는 동경미술학교 출신이었다. 이처럼 조선에 이주한 일본인 화가들의 상당수가 공립학교의 도화 교사로 근무하거나 조선총독부 주관의 조선 미술 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참여하거나 소규모 미술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특히 도화 교사로서의 활동은 학생에게 끼치는 영향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 부산에 거주하던 일본인 화가로는 등정(藤井), 안도 요시시게[安藤義茂], 일정위차랑(市井爲次郞/一井爲次郞) 등이 있었는데, 그 중 일정위차랑은 해방 전까지 13년 동안 동래공립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근무하면서 미술 활동을 하였다. 일정위차랑의 영향으로 동래고등보통학교 출신인 김재선, 서진달(徐鎭達), 최소암, 김종필, 김원갑, 김용환, 김종식(金種植) 등이 서양화를 배우게 되었다. 안도 요시시게는 191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후쿠오카현립 여자중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미술에 전념하고자 1927년 교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왔다. 광복동 근처에서 악기점을 하는 한편으로 미술활동을 하였는데, 1928년부터 1942년까지 열렸던 부산미술전람회[일어판 부산일보 주최]를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관여하였다.

한편 1922년부터 1944년까지 경성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문화 정책의 하나로 조선총독부 주최의 조선 미술 전람회가 개최되었고, 제3회 조선 미술 전람회전[1924년] 도록부터 부산 출신으로 기록된 일본인 금전청일(今田靑一), 등택준일(藤澤俊一), 미전복일(米田福一), 송전정차(松田正次) 등의 작품이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이후부터는 부산 지역 출신 화가들의 조선 미술 전람회 출품과 입상이 이어졌고, 부산 지역 서양화가들의 본격적인 미술 활동이 이어졌다.

부산 사람들은 일제 식민지 시기인 1920년대 초에 일본인의 미술 활동을 통해 서양 미술을 경험하고 배웠으며 일본인들의 미술 활동과 조선 미술 전람회 입선과 교육 과정을 거쳐 1930년대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서진달, 김재선은 동경미술학교로, 양달석(梁澾錫), 김용환, 김종식, 송혜수(宋惠秀)는 일본제국미술학교로, 임호(林湖), 김윤민(金潤玟), 김인태는 오사카미술학교로, 김경(金耕), 한상돈(韓相敦) 등은 일본 미술 학교로 유학하는 등 비록 일본을 통한 서양 미술의 학습이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서양 미술의 정신과 기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광복 후~1950년대]

미군정 시기, 정부 수립 시기, 6·25 전쟁 시기를 살펴보면, 광복을 전후로 일본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온 미술가들의 활동이 이어졌다. 광복 이후 미군정 시기인 1946년 3·1절 기념 미술전과 8·15 경축 미술전에 양달석, 우신출(禹新出), 서태문, 서성찬(徐成贊), 김남배(金南倍), 김종식, 김윤민 등이 회화 작품을 출품하였고, 당시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표현 양식은 후기 인상파풍과 야수파풍의 그림 경향을 보여 주었다. 같은 시기 1946년 가을 결성된 가칭 부산미술가동맹의 준비위원장인 양달석은 1947년 부산에 거주하는 모든 미술인이 가입한 부산미술가협회의 회장으로 뽑혔고 이들이 3·1절 기념 미술전과 8·15 경축 미술전 행사를 이어갔다.

한편 1949년 4월 경남미술연구회가 결성되어 부산 거주 화가인 김남배·서성찬·우신출·김봉기·김윤민·김원갑을 비롯하여 마산의 이준·이림·임호, 통영의 전혁림, 진해의 장윤성, 진주의 조영제가 참여하여 백양 다방에서 제1회 경남미술연구회전을 열었다. 2회 때 혁토사전으로 이름을 바꾸어 정인성, 박완서, 임응식의 사진 작품도 함께 전시하였다. 같은 시기 민주중보사가 1948년과 1949년에 걸쳐 주최한 부산 미술 전람회는 공모와 초대를 겸하며 광복 이후 부산에서 열린 최초의 공모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6·25 전쟁 시기 동안 부산으로 몰려든 전국의 피난민,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 중에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한도기[광복 이후 부산 영도에 건립, 운영된 근대 도자기 회사]에 의탁하거나 종군 화가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고 광복동 일대의 다방에서 수차례 전시를 가지기도 하였는데, 구본웅, 김중현 김환기, 남관, 장욱진 등을 들 수 있다.

6·25 전쟁 시기, 화가 김종식의 아틀리에에 이시우와 화가들이 모여 “서울 양반들이 부산에서 판을 치고 있는데 우리 토박이들이 가만있을 수 있나! 우리도 뜻을 모아 동인전을 열자.”라고 합의를 보고 흙 토자와 벽 벽자로 이루어진 토벽(土壁)이라는 이름의 동인을 만들었다. 1953년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제1회 토벽 동인전은 서성찬, 김윤민, 김영교, 김종식, 임호, 김경이 참여한 전시였고, 토벽은 2년간 이어졌다.

이후 청맥 동인전이 1956년 4월 추연근, 하인두, 김영덕에 의해 개최되었다. 토벽이 향토색 짙게 모였다가 헤어졌다면, 청맥은 엘리트 의식으로 모였다가 회원 중 일부가 서울로 떠나고 여러 가지 생활 여건에 따라 해산된 뒤에 김영교가 제자들과 함께 표현 이념과 관계없는 모임인 일선 미술 동인전을 열었다. 김대륜, 박종보, 오준기, 박용귀, 김수석이 1958년 3월 8일부터 14일까지 문화 회관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고, 1963년까지 2년마다 개최하여 3회까지 개최되고 흩어졌다.

[1960년대~1970년대]

1960년대 10년 동안, 1세대가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통해서 혹은 일본에 건너가서 서양의 그림을 배웠다면 2세대 중 일부는 서울에 올라가서 추상과 추상 이후의 그림을 배워 부산으로 돌아와 작업하였다. 이들 중 추상 형식에 뜻이 맞아 모인 그룹이 습지동인전[1965년~1967년]이었고, 3회전을 거듭하며 추상화풍으로 변모한 혁동인전[1963~현재]도 들 수 있다. 사실과 구상이 주를 이루던 미술계는 추상 미술로의 변화를 꾀하게 되는데 이는 부산 화단만의 풍경이 아니라 한국 미술계의 전체적인 흐름이기도 하였다. 이는 1970년대까지도 이어진 흐름이다.

당시 김강석 평론가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중반까지의 부산 미술계에 대해서 “부산 화단의 미술 풍토는 지극히 거칠고 메마르지만, 자전의 조형 언어를 각인하려는 작가들이 있다.”고 평하였다. 김강석에 따르면, 사실화풍으로는 우신출, 한상돈, 송혜수, 현용건, 나건파, 배봉화, 민병표, 김덕수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연 공간을 원근법과 명암법에 따라 3차원으로 묘사하였다. 이들에게 ‘사실’은 오늘의 조형 방법과 기법을 그려야 한다는 조형 이념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구상화풍으로는 전혁림, 추연근, 김종식, 임호, 양달석, 조동벽, 김원, 김원갑, 김윤민, 김원명, 엄성관, 민백향, 김봉진, 조목하, 신창호, 김천옥, 오준기, 박용귀, 김인근, 박대련, 권영춘, 김종근, 김홍규가 있다. 이들은 자연 공간을 그대로 재현하려는 사실화풍을 부정하지만 추상화풍을 그릇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조형 사고에 구상적인 실체를 보는 것이 당대의 현실을 드러내는 데에 알맞다고 보았다.

[1980년대]

1980년대에 들어 부산 화단에는 새로운 조형 언어들이 등장하였고, 부산에서 대학을 졸업한 작가들이 나타나면서 선배들과 함께 여러 소그룹 활동이 이어졌다. 특히 조형 어법에서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데, 1980년대는 이전 추상 경향의 회화와 달리 형상 회화가 등장한 시기였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화단은 추상 회화, 모노크롬 등이 지배적인 조형 언어였다. 1980년대 들어 새로운 세대들에 의한 형상의 등장은 새로운 미술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즉 부산에서 원로 작가 혹은 기성 작가들이 구상이나 추상을 꾸준히 다루었지만, 새로운 미술가들은 이들과 달리 대부분이 형상이 있는 회화를 그리게 되었다. 이들 회화의 특징은 현실에 침묵하였던 추상 회화와 달리 이야기와 현실을 그림에 담아낸 것에 의의가 있다.

형상이라는 조형 언어가 지배적인 미술 언어가 되었던 1980년대 중후반 등장한 미술 운동으로 형상 미술과 민중 미술을 들 수 있다. 형상 미술의 태동은 1980년 초반으로, 민중 미술은 중반 이후로 잡을 수 있는데, 형상 미술이 미술계 내부의 지배적 조형 언어였던 추상 회화에 반발하며 토양을 닦았다면 민중 미술은 미술계 바깥, 즉 사회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형상 미술은 개별적이고 다양한 미술 언어를 통해 개인의 구체적인 삶이나 실존적인 문제를 주로 그렸다면, 민중 미술은 민중의 삶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먼저 형상 미술에 대한 흐름을 살펴보면, 1986년 ‘인간-그 서술적 형상전’을 기획하였던 박은주는 기획의 변에서 “1960년대 태생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세대”가 이 흐름을 만들었고, 이들은 “현실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의식이 있으면서도 이를 민중 미술과 같이 직접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적인 메타포를 사용하여 형상을 표현하는 작가”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 세대가 등장하기 전 먼저 형상 회화를 그렸던 작가로 안창홍, 이태호, 정진윤을 들 수 있다. 안창홍은 인간의 이성을 부정하며 그림을 통해 인간의 악마성에 주목하였고, 이태호는 사실적인 경향을 띠는 그림을 그렸지만 인간의 실존 이면에 놓여 있는 외로움과 소외를 그렸다. 한편 정진윤은 당대의 부조리한 사회에 놓인 인간의 실존적 문제를 연극적 장치를 통해 그려 냈다.

이들 이후 형상 회화를 하였던 작가들의 작업의 주된 특징은 염세적인 세계관과 세기말적 분위기를 보이며 나타났다. 김정호, 김미애, 권영로, 박은국, 김성룡 등 이들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세계의 통증과 고통스러운 자의식이 맞물려 나타났다. 이외에도 장원실, 박경인, 김춘자, 이인철 등을 들 수 있다.

형상 미술에 비해 민중 미술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부산에서 공식적인 민중 미술 진영의 활동은 1987년 그림패 낙동강[부산미술운동연구소로 이어짐]을 들 수 있다. 전국의 민중 미술 운동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어 있던 이들 민중 미술 운동 계열의 작가들은 ‘작가’라는 자의식보다는 ‘미술 활동가’로서 집단적인 움직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작업하였다. 이들은 대중을 상대로 한 판화와 만화 강습 등을 진행하였고, 각종 시위 현장에 투입되어 걸개그림, 포스터, 깃발 등을 제작하며 미술이 정치적 발언에 힘을 싣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들은 걸개그림과 같은 집단 창작품을 통해 개인의 이름보다 집단의 의식과 집단이 추구하는 변혁에 더 열의를 보였다. 이들 그림에서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삶의 현장, 투쟁의 현장들이 잘 드러나는데 노동자, 농민, 여성 문제 등을 다루며, 예술가 자신을 넘어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표현하였다. 양호규, 김형대, 차윤기, 이정자, 송은주, 조순자 등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부산청년미술회, 해빙과 같은 그룹에서 이러한 그림들이 이어졌다.

[1990년대~현재]

1990년대는 매체적인 실험이 조금 더 다양해진 시기였다. 물론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루긴 하였지만,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도 매체에 대한 실험이 지속적으로 존재하였다. 그렇지만 1990년대 이후는 조금 더 확장된 의미로서 설치, 영상 작업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등장하였던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론의 영향이 컸으며, 형식 실험뿐 아니라 주제적인 면에서도 일상, 성, 욕망과 같은 개인의 삶이 미술 작품에도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따라서 부산 미술에서 199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회화 작업은 1980년대 형상 미술이나 민중 미술이 보여 주었던 집단적인 움직임은 없었지만, 회화의 주제가 개인의 관심이나 욕망이 두드러지는 쪽으로 흘렀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8.03.05 일본인 인명 한자 수정 일정위차랑(一井爲次郞) -> 일정위차랑(市井爲次郞/一井爲次郞)
이용자 의견
f***** 이치이 다메치로의 한자 표기가 '一井爲次郞'로 되어 있으나 여타의 기록을 살펴보았을 때 ‘市井爲次郞’으로 보는 것이 옳다. 이에 대한 수정이 필요하다.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소중한 의견을 검토한 결과 해당 인물에 대한 한자표기에 '一'과 '市'가 혼용되어 쓰이고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보다 다양한 접근성과 정보의 공유를 위해 두 가지 표기를 병기하는 것으로 수정하였습니다.
    귀하의 소중한 의견 개진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심과 이용 부탁드립니다.
2018.03.01
l******* <1980년대>란의 형상미술가 인명중 오기가 있으니, '장영실'은 '장원실'로 정정바람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 확인 후 수정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6.30
l******* (아래내용의 계속)1927년 부산으로 왔으며, 광복동근처에서 악기점을 하는 한편으로 미술활동을 하였음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기하신 의견 확인 후 수정 완료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2015.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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