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10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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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德浦上里- |
영어의미역 | Deokpo-Sangr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부산광역시 사상구 주례동 덕포상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영섭 |
성격 | 자연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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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740년 - 동래군 사천면 상단덕포리 |
변천 시기/일시 |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 |
변천 시기/일시 | 196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에서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5년 - 부산직할시 부산진구 덕포동에서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78년 - 부산직할시 북부출장소 덕포동에서 부산직할시 북구 덕포동으로 개편 |
변천 시기/일시 | 1995년 - 부산직할시 북구 덕포동에서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으로 개편 |
자연 마을 | 상리 마을 -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상리 마을 |
[정의]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에 있었던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적포는 옛날 서쪽 유두 강변에 있던 포구에서 유래한다. 덕포상리(德浦上里) 마을은 덕포동의 위쪽에 있는 마을로 윗덕포 마을, 웃각단이라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덕포상리 마을의 형성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을이 자리한 지역이 사람이 거주하기 좋은 위치여서 일찍부터 사람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지명은 『동래부지(東萊府誌)』[1740]에 “사천면 상단 덕포리 거관문 34리(沙川面 上端 德浦里 距官門 三十四里)”로 처음 확인된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동래군 사상면 덕포리가 되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가 되며 부산진구 사상출장소 덕포동이 되었다가 1975년 부산진구의 구포출장소와 통합하여 시 직할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78년 북구 덕포동이 되었다. 1982년 덕포동이 행정적으로 덕포 1동·덕포 2동으로 분동하였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부산광역시로 승격하며 북구에서 분리되어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동 덕포상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덕포상리 마을 동쪽으로 백양산이 자리하고, 서쪽으로는 삼락천이 흐른다. 남쪽으로는 엄광산과 승학산이 보인다. 백양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개발되기 전에 덕포상리 마을 위쪽에 소태골이 있었다. 이곳은 물이 많고 소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이 소태골이 있던 산등을 병풍등이라고 하였다. 현재 부산 도시 철도 2호선 덕포역 부근에 있던 상강선대에서 동쪽으로 한일시멘트 부산 공장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고개 넘개’라고 하였다. 옛날에는 이곳이 산이었는데, 한 장군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칼로 산 주둥이를 끊어서 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동네에는 장군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현황]
덕포상리 마을은 사상구 덕포 2동의 자연 마을이었으나 현재 도시 철도 2호선 덕포역, 덕포 2동 주민자치센터, 덕포초등학교, 한일시멘트 부산공장 등이 들어서고 아파트, 주택지로 변모하였다. 또 덕포 교차로, 백양 대로 등이 지나며 사상구 지역의 교통 중심지가 되어 있다. 마을은 19세기 말에도 사통발달의 지형으로 5일장이 개시되었다. 상강선대 아래쪽 유두강(柳頭江)을 낀 모래밭에 장터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장배[商船]들이 드나들었다. 덕포리의 유지인 강달래가 이곳에서 객주업을 하면서 밀양·청도 등 낙동강 연안 지역에서 곡물을 싣고 와 덕포장(德浦場)에서 해산물과 건어물 등을 교환하는 교역을 하였다.
사상 지역에 장터가 있었다는 것은 1893년(고종 30) 5월 12일의 『공문일록(公文日錄)』3책에 “덕포장의 선창에 배를 설치하여 바다의 수산물과 육지의 토산물(土産物)을 서로 바꾸는 일로 장이 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각사등록(各司謄錄)』17, 경상도 편(慶尙道篇) 7의 ‘첩보(牒報)하는 일’에 덕포장(德圃場)에 대한 문제점을 처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상 지역에 있던 덕포장은 구한말을 전후하여 생겨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덕포동에는 상설 덕포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옛날처럼 5일장은 열리지 않지만 시장이 성업 중이다.
마을에는 또 상강선대(上降仙臺)가 있다. 사상구 덕포동에 두 개의 암구로 형성된 독산(獨山)이 있는데, 이곳을 강선대라고 한다. 덕포동에는 강선대가 두 곳이다. 덕포하리 마을에 하강선대가 있다. 강선대는 당산제를 행하는 당집으로서의 기능과 진선계의 구심점을 이루는 동약(洞約)의 기능을 하였다. 이곳의 동약은 강촌 자연 마을에서 자생적으로 생겼던 것이다. 문헌에 기록된 것을 보면, 진선(津船)의 선임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동원의 상조, 상벌에 이르기까지 규정을 확대하여 향약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상강선대에는 할배 당산[사상구 덕포동 417-6번지]이 있다. 동민들에 의하면, 이 당산은 1700년경부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빌기 위하여 세웠다고 전하나 그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947년 11월 구 건물을 헐고 새로 지었다. 기와 팔작지붕에 적갈색 벽으로 되어 있다. 당산목인 느티나무는 수령이 300년이며, 주위에는 바위와 팽나무, 벚나무, 구갑송 등이 우거져 있다. 제의 날짜는 음력 12월 1일 밤 자정이며, 1년에 한 번 제를 올린다.
할배 당산 앞쪽에는 조선 시대 사상 지역 낙동강 삼차수 샛강인 유두강에 제방을 쌓았던 동래 부사 공덕비 3기와 효자비 1기가 있다. 1788년(정조 12)에 세운 ‘이경일 축제혜민비(李敬一築堤惠民碑)’, 1832년(순조 32)에 세운 ‘박제명 축제혜민비(朴齊明築堤惠民碑)’, 1840년(헌종 6)에 세운 ‘이명적 축제혜민비(李明迪築堤惠民碑)’는 각각 사상 지역의 입지 조건과 축제의 필요성, 홍수의 피해 상황, 축제에 동원된 인원 수 등을 밝히고 있다.
조선 시대 때는 사상 지역 들판에 농경지가 많았는데, 대부분 저지대에 위치하여 해마다 찾아오는 홍수의 피해를 면치 못하였다. 이 때문에 17세기에 들어오면서 하천 제방의 축제(築堤)와 곳곳에 부분적인 물막이 공사로 제방을 쌓았다. 이후 유두강 10리 물막이로 제방을 축제한 공적비가 덕포동 철로 옆 옛 큰길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이 지역 유지들이 의논하여 1971년 지금의 자리로 이설 관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효자비 1기는 ‘구주성 정려비(具周星旌閭碑)’이다. 구주성의 효성을 기리는 비석으로 『동래부지』 효자편에 보면, “효자 구주성은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드려 마침내 회생케 하였으므로 만력 경술년에 그 사실을 알고 정려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려비는 1715년(숙종 41) 마을 어귀에 세워졌다가 1971년 축제혜민비와 함께 지금의 자리로 이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