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9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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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宗敎 |
영어의미역 | Religion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부산광역시 |
집필자 | 조재호 |
[정의]
부산광역시에서 이루어지는 제반 신앙 행위의 총칭.
[전근대의 부산 종교]
1. 선사 시대
부산 지역에서 종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시기는 신석기 시기부터이다. 이때의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에 좌우되는 환경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다산, 풍요 등의 생업 활동에 대한 안전을 기원하기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단서로 부산 동삼동 패총(東三洞貝塚) 등에 남아 있는 조개 가면과 곰 모양의 토우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유물은 조개와 곰이 갖는 상징성으로 미루어 보아 신석기인의 종교 생활을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사슴 선각문 토기는 수렵 대상에 대한 기원과 이와 관련된 의식을 행하는 용기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에도 신석기 시대와 같이 다양한 신을 믿었다고 여겨지는데, 이 시기는 농경을 행하던 때이므로 당시의 유물은 농사와 관련이 깊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돌칼과 옥, 토기 등의 유물을 일부러 불에 그을리거나, 부셔서 밭에 뿌린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부산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 선돌 등을 통하여 청동기 시대의 종교 행위를 엿볼 수 있다.
2. 고대 시대
삼한 시대의 부산은 변한 지역으로서 다양한 신앙의 형태가 찾아진다. 부산 동래 패총에서 출토된 복골, 조도 조개더미[조도 패총] 등지에서 출토된 동물 뼈 등은 해양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홍수나 가뭄의 방지, 원거리 항해의 안전 등을 수신과 해신에게 기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한 시대의 무덤인 널무덤[목관묘(木棺墓)], 독무덤[옹관묘(甕棺墓)], 덧널무덤[목곽묘(木槨墓)] 등은 조상신에 대한 제사의 한 형태였다.
삼국 시대 신앙은 토착 신앙과 불교 수용기로 구분된다. 토착 신앙은 자연에 대한 숭상이다. 토착 신앙의 예로 천신, 지신, 산신, 수신, 해신, 조상신 등을 들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칠두령(七頭令)[부산 복천동 고분군 22호]은 무덤의 주인이 천군의 전통을, 또 이곳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묘제는 조상신에 대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수신과 해신에 대한 것은 해안가나 강가에서 발견되는 복골, 동물 뼈를 통해서, 그리고 해신을 제사하는 형변(兄邊)[부산 수영만 일대]을 두었던 사실에서 신라 전통 신앙을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삼국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신앙은 불교이다. 그러나 부산은 경주의 외곽 지역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자료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산 지역의 묘제 규모가 줄어들었다는 점은 국가의 통제가 이곳까지 미쳤고, 이는 조상 숭배 의식에도 불교의 영향이 크게 미쳤음을 의미한다.
통일 신라 시대의 신앙은 불교가 대세였다. 대표적으로 범어사(梵魚寺), 장안사(長安寺), 척판암 등을 들 수 있다. 다만 범어사는 의상 계통, 나머지는 원효 계통의 사찰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범어사를 중심으로 하는 동래 지역은 의상계의 영향 하에 있었고, 장안사, 척판암 등이 있는 기장 지역은 원효계 사찰인 것이다. 이 외에도 민간 신앙으로 신사가 형성되어 기우제 등을 지냈다.
3. 고려 시대
고려 시대는 다원 종교의 시대였다. 불교, 유교, 도교 등이 유행하였고, 그 외 토속 신앙 등이 이어졌다. 불교는 만덕사(萬德寺)와 범어사, 그리고 장안사 등지를 중심으로 행해졌고, 전통 신앙으로 부산의 진산인 금정산 고당봉의 고당신을 모시는 고당 할매 신당에서 산악신앙[산악숭배]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해신이나 수신에게 비는 「동해안 별신굿」의 형태에서 무격신앙(巫覡信仰)[무당과 박수를 신과 인간의 매개체로 생각하는 신앙]을 엿볼 수 있다.
4. 조선 시대
조선 시대는 불교, 도교 등 전통 신앙 이외에 천주교가 들어온다. 조선 시대는 억불 정책이 유지되던 때이므로 불교에 대한 전반적인 것은 잘 알 수 없지만 부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었다. 특히 금정산을 배경으로 위치하는 사찰이 대부분으로, 이들은 사찰계를 만들었다. 현재 주목되는 사찰계는 범어사와 토착 신앙과 연계한 칠성계(七星契)이다. 칠성계는 칠성 신앙(七星信仰)을 토대로 한 것으로, 칠성 신앙은 무병장수, 자손의 번성을 기원한다.
특이하게 19세기 중엽부터 천주교가 부산에 전파되었다. 1861년에 천주교도가 형성되었고, 1868년 무진박해 때 8명의 신도가 처형되기도 하였다. 또 부산은 민간 차원에서 관성제군(關聖帝君)인 관우(關羽)를 숭배하는 신앙이 있었다. 이는 임진왜란 때 들어와 19세기에 확산되었는데, 관에서 재정 지원을 하기도 하였다. 이는 관우가 무신이기도 하지만 재부(財富)의 신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즉 부산은 대일 교역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상업 활동과 관우 신앙이 잘 결합될 수 있었다.
유교는 정치와 습합되어 여러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이 사직단[문묘], 성황사(城隍祀), 여단(厲壇), 절영도 신사(絶影島神祠), 모등변 신사(毛等邊神祠)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이후 충렬사(忠烈祠), 농주단(弄珠壇)[농주산 전망 제단], 송공단(宋公壇), 정공단(鄭公壇), 윤공단(尹公壇), 의용단(義勇壇), 신무단(神武壇), 만공단(萬公壇) 등 많은 사묘와 제단이며, 정부는 이를 통해 충효 사상을 널리 전파하였다.
조선 시대의 신앙 가운데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민간 신앙이다. 조선 시대에는 마을 단위의 신앙 형태가 이루어졌다. 즉 이것은 마을 단위로 각 가정이 무사하고 풍농과 풍어를 기원하는 공동 제의로서 당산제와 각 집안에서 행하는 가택신 및 풍수신앙(風水信仰)이 있었다. 부산 지역에서 당산제는 287개 마을에서 주로 음력 정월 14일 자정 무렵과 15일에 행해진다. 가택제나 풍수신앙도 부산 전체에서 행해진 보편적인 신앙의 형태였다.
[근대의 부산 종교]
부산은 조선 시대 이래 유일한 대일 창구였다.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오는 모든 종교는 부산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천주교(天主敎), 개신교(改新敎) 등을 비롯하여 일본의 신종교까지 함께 들어왔다.
1. 천주교
먼저 천주교의 전래이다. 천주교는 유일신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는 종교이다. 천주교의 교리를 살펴보면,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천지의 창조주인데, 타락한 인류를 구제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사람으로 보냈다. 그 사람이 바로 성자로서 그는 세상을 구원하고자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택하였고, 다시 부활하여 성부에게로 돌아갔다고 한다.
천주교는 17세기 중엽에 북경을 왕래하던 사신에 의해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초기에는 학문적 대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영조 말엽 당시 정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성리학자들의 일부가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천주교의 근본 사상이 유교의 우주관·세계관·사회관 등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교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신분 계급주의를 배격하고 신분과 남녀·성분의 평등을 주장하기 때문이었다. 천주교는 1795년(정조 19) 전라도에서 일어난 박해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이러한 고난을 겪었다.
부산에서도 1868년(고종 5) 이정식(李廷植)[1795~1868], 이관복[이정식의 맏아들] 등을 포함한 수많은 천주교인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이러한 순교에도 불구하고 1866년 한불 조약 이후 천주교가 서서히 정착되어감에 따라 부산에서도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동래본당의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된 조조(Jozeau) 신부는 1886년(고종 23) 경상도에 최초로 설립된 대구본당을 근거지로 삼고 로베르토(Robet) 신부를 도와 약 10개월간 경상도·충청도·강원도 일부까지 순회 전교하면서 부산 부임을 기다렸다. 그러던 중 1890년(고종 27) 영도에 부임하여 약 3년간 전교하였고, 후임으로 온 우도 신부가 1892년(고종 29)부터 1899년(고종 36)까지, 드망(Demang)[안세화(安世華)] 신부가 약 1여 년간, 롤트(Rault) 신부가 약 2년간 전교하였다.
이후 계속 부산본당 주교로 프랑스인 신부가 부임하다가 1940년 서정길 신부가 부임하여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후 자주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부산 교회 사업을 시도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부산 중앙본당의 설립이었다. 6·25 전쟁 이후 1957년 부산교구(釜山敎區)가 발족하였고, 교세 또한 3만여 명으로 성장하였다.
2. 개신교
개신교는 1884년(고종 21) 최초의 선교사인 감리교의 미국인 메클레이(R.S. Maclay) 목사와 장로교 선교사인 알렌(H. N. Allen)[1858~1932]이 온 것이 한국 기독교의 시작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1881년(고종 18) 일본 동경으로 유학생을 인솔해 갔던 승지 이수정(李樹廷)[1842~1886}이 요코하마 주재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 목사 등을 통하여 신자가 된 후, 1882년(고종 19) 세례를 받은 기록이 있고, 이보다 앞선 1832년(순조 32) 독일인 선교사인 귀즐라프 목사가 중국에서 전도하던 중 충청도 홍천 고대도와 금강 입구에 상륙하여 약 40일간 전도를 하고 돌아간 예가 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1884년(고종 21) 기독교가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후, 1890년(고종 27) 전후가 되어 선교구 조정 문제가 생길 때까지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서울을 본거지로 하여 순회 전도로써 교파 세력을 확대해 갔다. 선교사들의 선교지가 교파끼리 중복되는 경우가 많아지자 선교부의 대표자는 서로 간의 혼란과 충돌을 피하고 서로 협동하여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본 방침을 세우려고 노력하였다. 그 예가 1892년(고종 29)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와 감리교 선교부 간의 선교 지구 합의이다. 두 선교부는 5,000명 이상의 도시는 두 선교부가 같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작은 도시에서는 이미 그 곳을 개척한 선교부가 계속해서 선교 사업을 하기로 약속했다.
일제 식민지 지배 하에서는 기독교가 대단한 탄압을 받았다. 왜냐하면 일제는 한반도 침략 과정에서 기독교를 가장 큰 장애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산의 기독교 전파는 1889년(고종 26) 호주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J.H. Davies)[1856~1890]가 전도를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부산 최초로 1893년(고종 30) 초량교회가 설립된 이후, 1901년(고종 38) 부산진교회와 영주동교회[현 모자이크교회], 1902년(고종 39) 안평교회 등이 세워지면서 부산에서의 전도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부산의 초기 교회는 대부분 장로교회였고, 대부분이 호주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들에 의하여 전도되었다. 호주 장로교의 첫 선교사 데이비스는 1889년에 처음 부산에 왔다. 그 전에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부가 한국에 설치된 후 중국에 주재 중이던 알취데콘 존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1832~1915] 선교사가 한국으로 와 중국인 선교사로 하여금 부산 지방에 소규모로나마 전도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호주 선교사인 데이비스가 부산에 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초기의 전도 활동은 주로 부산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04년(고종 41)에 동래, 마산, 진주, 거제, 통영 등에 선교 본부를 두고 경상남도 전역으로 전도 지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호주 선교부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함께 부산·경상남도 지역을 선교하였으나, 1908년(순종 2) 부산·경상남도 일대가 호주 선교부의 선교지로 결정됨에 따라 부산·경상남도 일대는 호주 선교부가 선교 활동을 하게 된다. 호주 선교부는 전도 사업뿐만 아니라 사회사업, 의료 사업, 교육 사업 등을 통하여 지역 사회에 공헌하였다.
해방 이전 부산 교계는 한국 전체의 교계와 함께 위축의 극에 달했다. 그 때의 상황은 장로교 소속 교회가 여섯 개[초량교회, 부산진교회, 영주동교회, 항서교회, 동래읍교회, 부산교회]였고, 그 교인 수가 합쳐서 1,000명 내외에 불과하였다. 성결교 소속 교회는 수정동교회와 온천동 두 군데였고, 구세군은 범일동에 교회가 있었을 뿐이었다. 가령 1931년 부산의 교인 수가 초량교회를 제외하고도 992명이었는데, 14년 뒤인 1945년의 교인 수가 1,000명 내외였다면 일제의 압제를 기독교가 얼마나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3. 원불교
원불교(圓佛敎)는 교조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에 의해 1916년 창립된 종교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선포한 박중빈의 정신에 따라 처음부터 간척 사업, 육영 사업, 저축 사업 등과 같은 현대 사업화에 절실히 필요한 사업들을 근거로 종교 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른바 영육쌍전(靈肉雙全)과 이사병행(理事竝行)의 실천을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현실에 옮겼다.
원불교는 사상면에서는 동학 및 한국 고유 전통 사상과 현대 사회의 사회 참여 및 개혁 동기를 모두 조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수많은 자생 신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균형 있는 성장을 하여 온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박중빈 대종사는 1924년 익산총부를 건설한 이후 서울 지방에 이어 부산 지방에도 교당 창설을 계획하였는데, 부산 지방의 교화는 장적조와 김기천에 의해 개척되기 시작하여 1931년까지 40여 명이 입교하였다. 현재 부산교당의 초기 이름인 남부민교당에서 있었던 박중빈 대종사의 부산 집회를 계기로 80명으로 불어났고, 하단교당[현 당리교당]이 창설되었다.
4. 일본 종교
천리교(天理敎)는 1838년(헌종 4) 일본의 나라에서 교조 나까야마 미끼[中山美依, 1798~1887]가 창시하였고, 어버이신 천리왕이 직접 이 세상에 하강하여 가르침을 편 종교이다. 천리교의 교리는 우주 만물의 창조주 천신을 어버이신으로 믿으며, 어버이신이 우주 만물을 생성 화육하는 섭리와 신의 현신인 어버이님을 통한 천리의 교리를 일일 생활에서 실천하여 어버이신의 의사인 양기 세계, 즉 천인 공락(天人共樂)의 이상 세계를 구현시킬 것을 신조로 삼고 있다.
부산에 들어온 천리교 포교자들은 개항지에서 병자를 간호하는 등의 형태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는 일본 신흥 종교의 부산 진출은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일본 국내에서 미신 집단으로 규정되었던 천리교와 금광교가 문명 일본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힐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본인은 천리교가 부산에 진출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위험을 무릅쓴 포교 활동이 오히려 영웅시되어 포교에 진가를 발휘하였다.
1903년 일본인 사도미 다로오가 부산에서 최초로 포교를 시작하였고, 1904년 12월 11일 부산부 보영정(寶永町)에서 ‘신리 천리교 부산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한국에서 천리교 신도 집단이 합법적인 존재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상은 금광교의 부산 진출도 비슷하다.
개항과 더불어 일본 불교가 들어왔다.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부산은 일본 불교의 포교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1878년(고종 15) 일본 정토진종은 대곡파 본원사 분원을 부산에 개원하였다. 1881년(고종 18) 일련종의 도변일운이 부산에 건너와서 일종회당을 건립하고, 1890년(고종 27)에는 일본 교토 묘각사가 부산에 일종해외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한일 합병이 되기 이전까지 임제종, 일련종, 정토종, 조동종, 진언종 등 일본의 모든 종파가 부산에 이입되었다.
이러한 일본 종교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부산의 범어사는 적극 대응하였다. 1800년대 이후 구축한 각종 계 조직을 바탕으로 선원을 통한 선풍을 진작하여 불교 본연의 모습을 세우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1910년 한국 불교의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그 동안 일본 승려가 담당했던 역할을 조선의 불교와 승려들에게 요구하였다. 즉 충실한 일본 신민을 만드는 정신적 계몽 사업으로써 불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찰령」을 공포하였다. 이로써 사찰의 조직은 행정적 조직이 되고, 주지는 총독부의 지배를 받는 관리가 되었다. 범어사의 오성월(吳惺月)[1866~1943], 한용운(韓龍雲)[1879~1944] 등이 1911년 한국 불교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송광사에서 임제종(臨濟宗)을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일제 탄압에 맞서 임제종의 총무원을 범어사로 옮겼다.
[현대의 부산 종교]
해방이 되자 일제의 잔재를 끊어내고자 각 분야에서 노력하였다. 그러한 모습은 종교계에도 계속 이어졌다. 또 6·25 전쟁은 부산을 새로운 종교의 탄생지로 만들기도 하였다. 부산은 불교 신도가 많고, 개신교 신도가 제주도와 함께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이는 여전히 불교가 부산 시민에게 영향을 많이 끼치는 종교임을 알 수 있다
1. 불교
한국 불교는 해방이 되자 일본 불교의 지배와 그 영향권을 부정하고 새로운 의미로서의 불교를 부흥시켜 갔다. 조선 시대에 통합되었던 선·교 양종을 근원으로 많은 신흥 종파가 생겨나게 되는데, 비구와 대처로 갈라진 조계종이나 태고종, 법화종 계열의 5개 파, 밀교 신앙 계열의 2개 파, 원효 신앙계의 3개 등 18개의 종파로 분리되었고, 최근에는 더욱 많은 분화가 이루어졌다.
부산의 불교도 범어사를 중심으로 정화 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 동산(東山) 스님이 있다. 동산은 1940년 백용성이 대각사에서 입적하자 범어사 금어선원에 조실로 주석했다. 1941년 2월부터 선학원에서 개최된 유교 법회에서 불교 정화의 기치를 내걸었다. 이로써 동산은 부산 불교 정화 운동을 주도하여 일본풍을 없애고 한국 불교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2000년대 부산 지역의 불교는 2,500여 개의 크고 작은 암자와 3,000여 명의 승려, 2백만 불자가 있는 거대 지역이다. 주도하는 종단은 대한불교 조계종, 한국불교 천태종, 대한불교 법화종,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원효종 등이다. 그리고 각 종단 아래의 사찰에서는 이러한 불교를 더욱 진작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교육, 복지 사업을 들 수 있다.
2. 개신교
해방을 맞이하자 개신교 내에서도 신사 참배 문제로 홍역을 치르게 되었다. 그 중심에 부산이 있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개신교 인구는 전 인구의 20% 정도로 간주되지만 부산에는 전국 평균 이하인 5~6% 정도로 추정된다. 개신 교회는 교육, 의료 복지 등 부산 지역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3. 원불교
6·25 전쟁 이후 원불교는 92개 교당이 새롭게 창설되었다. 1971년까지 교인 수가 8만 여 명이 증가하였으며, 부산교당 역시 1977년에 부산교구청으로 승격되고, 부산 지역에 동·서 두 개의 교구가 분리되게 되었다. 2000년대 부산의 원불교는 대연, 동래, 부산, 서면 지구로 구분되어 있으며, 45개 교당이 있다.
4. 대한천리교
대한천리교는 광복 이후 1954년 대한천리교 본원으로 개칭하였고, 1973년 기구 개편에 따라 부산교구를 발족하여 초대 교구장에 정복근을 선임하였다. 당시 교구 청사로 동래구 수안동 소재의 동래교회를 임시로 사용하였다. 1975년 5월 영도구 동삼동 소재 원남선교회로 사무실을 옮겼다. 1980년 제3대 교구장으로 배차효를 임명하였다. 1983년에 부산진구 양정 3동에 교구 신청사를 마련하였다. 1986년에는 부산·경상남도의 천리교도 가운데 일부가 한국천리교연합회를 발족하였으며, 같은 해 양정동에 있는 교구 신청사를 폐쇄하였다. 현재는 사무실이 초량동에 있다. 그리고 부산, 서울을 포함하여 전국에 교회 1,200여 개소, 포교소 1,800여 개소, 신자 수는 약 4만 명으로 추산된다.
5. 통일교
부산 지역에서의 통일교(統一敎)[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형성은 한국에서 통일교가 정착한 것과 같은 시기이다. 문선명(文鮮明)이 6·25 전쟁의 피난으로 1951년 부산에 도착하여 범냇골 성지를 중심으로 한 범내골 토담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전도한 강현실을 대구·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한 것이 통일교회사의 최초의 선교라고 할 수 있다. 그 뒤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던 이요한 목사가 통일교에 입교하였으며, 그가 제주도에서 전도한 이봉운 장로의 가정이 부산으로 건너옴으로써 통일교회 선교가 활발히 전개된다. 통일교회의 편제는 중앙에 협의회가 있고 각 도에 교구가 있으며, 시·군·구에는 교역이 있고 면·동에는 교회가 있다. 부산교구에는 교구 본부 1개소, 교역 본부 10개소, 교회 3개소 등 도합 14개의 교구·교역·교회 등이 있다.
6. 태극도
부산의 대표적 신흥 종교는 태극도(太極道)이다. 태극도의 창시자는 조철제(趙哲濟)이며, 증산도 계통으로 현재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 3동에 본부가 있다. 태극도의 교리는 상제인 증산을 삼계를 주재하는 하느님으로 삼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신다. 또 이 상제는 하느님의 시자, 독생자, 계시 받은 자가 아닌 하느님 그 자체라고 한다. 그리고 인위적이 아닌 조화 정부를 열어 주재하시며, 인간계만이 아니고 신명계까지도 건진다고 한다. 상제의 명을 받은 조철제는 무극(無極)의 진리를 창도하였다고 한다. 이 무극은 태극(太極)으로서 우주를 가리키는데, 우주됨의 원시부터 본연의 법칙과 신비스런 묘함을 바로 태극으로 설명한다. 이 태극은 극이 없으므로 태극이라 이르고, 오직 하나일 뿐 둘이 있을 수 없으므로 태극이라 이른다. 또한 이 태극은 지리(至理)의 살리는 바요, 지기(至氣)의 행하는 바요, 지도(至道)의 나오는 바라고 설명하고 있다.
1909년(순종 3) 조철제는 증산 교리에 입교하였고, 1917년에 충청남도 안면도를 중심으로 포교하였다. 1948년 부산시 보수동에 태극도라는 교명으로 본부를 두었다가 1955년 지금의 본거지인 감천동으로 이전하였다. 조철제의 사망 이후 권력을 가진 도전 박한경의 전횡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박한경은 자신의 세력을 중심으로 대순진리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태극도가 분열되었고, 1968년 박한경이 탈퇴하고 조철제의 친아들 조영래가 교단을 이끌었다. 이후 도전은 바뀌었지만 감천 2동은 태극도 마을로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다.
7. 기타
1985년 한국종교학회에서 조사·간행한 「한국 신종교 실태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부산 지역의 기타 신흥 종교는 앞에서 소개한 태극도를 포함해 9개가 된다. 이들은 크게 불교계, 기독교계, 증산도계, 무속계 등으로 구분된다. 태극도를 제외하고는 교리나 교세가 명확하지 않아 이름만 밝히자면 대한불교 봉래미륵대법사[영도구], 세계메시아교 한국본부[수영구], 용화미륵불교연구회[금정구], 대한정도교[부산진구], 하나님의 교회[해운대구], 부산타불교[영도구], 태화교[영도구]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