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240 |
---|---|
한자 | 朝鮮日報釜山支局 |
영어의미역 | Joseonilbo Busan Branch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보영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에 있었던 조선일보사 부산 지국.
[설립 목적]
일제 강점기 신문들은 당시의 제반 여건상 전국을 관리하는 취재망을 갖추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지국의 기자들의 취재나 지역 신문 등 제한된 정보원을 가지고 지방 관련 소식을 운영하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부산 소식을 전하고, 보급망을 넓히고자 하는 목적에서 조선일보 부산지국이 설립되었다.
[변천]
조선일보 부산지국은 1920년 6월에 설립되었으며, 초대 지국장 지영진(池榮璡)[재임 연도, 1920. 6~] 시절에 사무실은 부산부(釜山府) 지나정(支那町)[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두었다. 1921년 1월에 제2대 지국장 안명환(安命煥)[재임 연도, 1921. 1~]이 취임하면서 부평정(富平町)[현재 중구 부평동]으로 옮겨졌고, 그해 11월에 부산부(釜山府) 영정 9정목 5번지로 이전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사무실을 부산부 본정 3정목 27번지로 옮겼으며, 그해 10월에 황기수(黃紀秀)[재임 연도, 1923. 10~]가 지국장으로 취임하였다.
제5대 지국장 김영곤(金泳坤)[재임 연도, 1926. 8~]이 운영을 맡으면서 사무실을 부산부 영주동 입구로 이전하였다. 1928년 3월 윤일(尹一)[재임 연도, 1928. 3~] 때에는 부산부 영주정 592번지에 설치되었고, 1929년 지국장이 최철룡(崔喆龍)[재임 연도, 1929. 6~]으로 바뀌면서 여주정 619번지로 이전하였다. 이후의 변천 과정에 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현재에도 운영 중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일보 부산지국은 분국을 확대해 나가는 한편, 지국의 내부 조직을 확대 개편해 가면서 영역을 넓혀 나갔다. 조선일보 부산지국 산하 분국으로는 동래분국[1923년 1월 설립]과 목도분국[1923년 5월 설립], 기장분국[1927년 11월 설립]이 있다. 특히 조선일보 부산지국 목도분국은 1927년 6월에 오락계를 설치하여, 독자들을 대상으로 매월 1회씩 현상 퀴즈 문제를 공모하여 정답자에게 『조선 일보』 1개월 구독권의 부상을 수여하는 이벤트를 실시하였다.
조선일보 부산지국은 약간 명의 기자를 두고 취재 활동을 벌여 지면에 부산 인근 지역의 소식을 담당하였다. 지·분국장 외에 총무와 기자를 두고 있으며, 고문을 두기도 하였다. 일부 지역에 따로 주재 기자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사진사도 두었다. 창간 이래 지속적으로 지방의 보급망 확장에 나서 조선일보사는 1938년에는 경상남도 내에 24개 지국과 13개 분국을 설치하였다. 지국과 분국은 각종 후원 및 주최 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체육 행사[운동회, 야구, 축구, 궁술, 수영, 씨름, 육상, 정구 등], 영화, 연극, 음악, 서화 관람회, 관광, 무도, 야담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 후원하였다.
[현황]
2013년 현재 조선일보 부산지국은 동(洞)별로 분산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단순 보급소의 역할만을 담당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국지인 『조선 일보』를 부산에서도 쉽게 제공받고, 부산의 소식을 발 빠르게 취재하여 전국에 알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선일보 부산지국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일제 강점기 전국지 신문사들은 지방 기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지방판을 발행하였는데, 지방판 발행은 지방의 소식을 알린다는 목적도 있겠지만 이면에는 지방의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전략의 성격이 강하였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정 지방을 소개함으로써 그 지방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배가시켜 구독으로 연결하고, 그 지역의 기업이나 단체 등의 광고도 유치하려는 전략으로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