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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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草梁倭館詞 |
영어의미역 | Song of Waegwan in Choryang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진 |
[정의]
1811년 이학규가 부산광역시 중구 일대에 있었던 초량 왜관을 보고 읊은 칠언 절구 형식의 연작 한시.
[개설]
「초량왜관사(草梁倭館詞)」는 1801년 신유사옥(辛酉邪獄)과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김해로 유배된 조선 후기 문인 이학규(李學逵)[1770~1835]가 1811년 초량에 와서 왜관을 방문하고 감회를 읊은 연작 한시(連作漢詩)이다. 「초량왜관사」는 이학규의 문집인 『낙하생전집(洛下生全集)』에 실려 전한다.
「구성」
「초량왜관사」는 칠언 절구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총 20수이다. 「초량왜관사」를 쓸 당시 이학규는 김해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량왜관사」는 김해에서 초량으로 향하는 길목인 왜관의 서북쪽 들판에서 왜관을 바라본 모습을 그려 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왜관 가까이에서 본 서관(西館)과 연대청(宴大廳), 동향사(東向寺)와 관련된 모습을 묘사한 후, 수문(守門) 앞에서 이루어지는 개시(開市)와 관련된 무역품과 민속 등을 시에 담고 있다. 이어서 관수(館守) 일행의 귀환 행렬과 연회, 왜관의 밤풍경 등을 묘사하였고, 구체적인 생활상의 하나로 일본도(日本刀)와 일본 정원(庭園)의 수목 등도 시에 담았다.
제18수~제20수 3수에서는 초량 왜관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대판(大阪)의 번화함과 이십사교(二十四橋)는 물론 비파호(琵琶湖)와 부사산(富士山), 황거(皇居) 등을 그려 내고 있다. 이는 아마도 이학규가 『해행총재(海行摠載)』 등을 통해 얻은 일본에 대한 견문을 바탕으로 상상으로 그려 낸 것인 듯하다. 이학규는 비파호와 부사산을 거론하면서도 봉래(蓬萊)[동래]와 영가대에 비기고, 황거를 말하면서도 북한산와 제성(帝城)을 거론함으로써 민족적 자존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내용」
초량 왜관은 부산에 설치된 일본인 전용 거류 지역이고, 항상 수백 명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왜관 내의 모든 건물과 풍습이 일본풍이었다. 「초량왜관사」에는 이학규의 눈에 비친 19세기 초 초량 왜관의 주요 건물들과 주거 문화, 생활 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제4수에서는 별원(別院)에 대해서 읊고 있는데, 오노쥰코[小野潤子]는 이 시를 남색(男色)에 대한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동향사(東向寺) 승려의 모습과 차림새, 우피(牛皮)·황금(黃芩)·칠 상자·우산·종이 같은 무역품, 신선로와 왜전골 등의 요리가 쓰이는 연회, 관수(館守) 일행의 귀환 행렬, 연회 장면, 일본도, 일본주(日本酒), 정원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징」
「초량왜관사」는 시인이 자신의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시인의 눈에 비친 모습들을 그려 내는 전형적인 경물시(景物詩)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학규가 1809년에 지은 30수로 된 「금관죽지사(金官竹枝詞)」와 마찬가지로 죽지사 계열의 시이다.
「의의와 평가」
이학규의 「초량왜관사」 이전에도 몇몇 문인들에 의해 왜관을 노래한 시들이 지어진 바 있다. 권호문(權好文)[1532~1587]의 「김돈서최자수김수우회왜관(金敦敍崔子粹金守愚會倭館)」, 윤순지(尹順之)[1591~1666]의 「차신종사영왜관운(次申從事詠倭館韻)」, 윤기(尹愭)[1741~1826]의 「왜관(倭館)」, 허유(許愈)[1833~1904]의 「왜관」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그런데 권호문과 윤순지의 시는 1678년에 왜관이 두모포에서 초량으로 이설된 이후의 작품이므로, 초량 왜관을 노래한 고전 작품이라 하면 이학규의 「초량왜관사」를 떠올리게 된다.
초량 왜관은 일본의 도시 하나를 축소해서 부산 지역에 설치한 것과 비슷했기 때문에 이학규에게는 일종의 이국 문화 체험이었고, 그 체험과 관찰의 결과가 「초량왜관사」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초량왜관사」는 19세기 초에 왜관의 풍속이 어떻게 부산과 부산 인근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또한 일본의 종가 문서(宗家文書)와 관수 일기(館守日記) 등과 관련지어 검토하면 한·일 간의 문화 교류와 민속의 비교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