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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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府使李重協記 |
영어의미역 | Story of Chief Administrator Yi Junghyeop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양리 |
[정의]
1726년 동래 부사 이중협이 찬주헌을 중건한 전말을 기록한 기문.
[개설]
「부사 이중협기(府使李重協記)」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중협(李重協)[1681~?]이 1726년(영조 2) 막좌(幕佐)[감사를 도와 곁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위한 숙소인 찬주헌(贊籌軒)의 중건기(重建記)이다. 이중협은 1713년(숙종 39)에 증광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1725년(영조 원년) 7월에 동래 부사로 도임하였다가 다음 해 12월에 교체되었다. 서울로 올라가기 직전인 1726년 겨울, 찬주헌을 중건하였다. 찬주헌은 동래부 동헌인 충신당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구성]
본래 건물의 벽에 기록한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동래부지(東萊府誌)』 제영 잡저(題詠雜著) 찬주헌 편에 실려 전해진다. 총 214자로 비교적 소략하다. 저자는 먼저 찬주헌 중건 경위를 상세히 밝혀 자신의 중건이 도의에 어긋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기(記)의 말미에는 찬주헌의 규모를 대강 기록하고 있다.
[내용]
동래 도호부는 남방의 중요한 진영으로 옛날부터 전해 오는 막좌의 청사가 있었으나 규모가 매우 협소하고 저습하였다. 또 해가 오래되었으나 지붕을 고치지 아니하여 기와가 깨어지고 기둥이 휘어져서 거의 무너지게 되었다. 매년 찌는 듯한 더위와 쏟아지는 비가 오면 비장들이 다른 장소로 흩어져 거처하였으니, 실로 큰 고을의 체모가 이지러지는 일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장수는 비장과 더불어 조석으로 변방의 사무를 모획(謀劃)[일을 해결하기 위한 생각이나 수단]하는데 이미 그 봉급을 후하게 할 수도 없는 데다, 또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곳에서 살게 해서야 되겠는가? 이 고을에 부임하고부터 고쳐 지으려고 하였으나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을 돌보느라 힘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가을이 되자 내가 병이 심하여 장차 벼슬을 내놓고 집에 돌아갈 처지에서 막부의 제군들에게 말하기를 “관직에 있는 자의 집무실은 여관과 같은데 하나라도 손을 대지 아니하면 끝내 이루지 못한다. 제군의 뜻은 어떠한가?” 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이제 비록 관사를 만들지라도 우리들은 살지도 못하면서 이를 만드는 것이라 이것은 성신(誠信)입니다” 하였다.
여기에서 봉급의 나머지를 조금 출연하여 재목과 기와를 모으고 일꾼을 모집하여 만 한 달 만에 낙성을 고하였으니 청은 모두 여덟 칸이고 그 좌우에 방을 만든 것이 여섯 익랑(翼廊)이요. 마구와 대문과 측간을 모두 마련하였으니, 밝고 시원하며 견고하고 조밀하여 전경을 크게 개선하였던 것이다. 드디어 전말을 청(廳)의 벽에 썼으니, 이는 후래자(後來者)로 하여금 경시(經始)한 까닭을 알게 할 뜻이다.
[특징]
일반적으로 기문(記文)에서는 그 대상이 되는 건물의 위치와 주변 경관, 건물의 명명(命名) 이유를 밝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찬주헌의 중건을 기록한 「부사 이중협기」의 경우에는 그러한 내용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며, 다만 중건 경위만을 설명할 뿐이다. 이는 아마도 찬주헌이 막좌의 숙소로 사용된 건물로 일반적인 누정(樓停)과는 성격이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현재 찬주헌은 소실되고 남아 있지 않다. 「부사 이중협기」는 찬주헌의 중건 시기와 규모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부사로서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찬주헌을 지었다는 것으로 보아 후일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하는 저자의 마음 씀씀이 역시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