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10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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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蓬萊別曲 |
영어의미역 | Song of Bongnae[Jeong Hyeondeok]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류속영 |
[정의]
1869년 정현덕이 동래 지역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감회를 읊은 가사.
[개설]
「봉래별곡」은 정현덕(鄭顯德)[1810~1883]이 동래 부사의 임기를 마치고 1869년(고종 6) 12월 이조 참의의 벼슬을 받아 떠나갈 때, 임기 중에 금정산성에서 시작하여 태종대에 이르기까지의 명승지와 사적지를 돌아보면서 읊은 기행 가사이다. 「봉래별곡」은 총 117구로 이루어진 순 한글 필사본이다.
[구성]
「봉래별곡」은 창작 동기를 읊은 12구까지의 서사(序詞), 동래를 구경한 내용과 일본의 관문인 동래를 지키겠다는 항일 정신을 나타낸 106구까지의 본사(本詞), 성은(聖恩)을 갚기 위하여 귀경(歸京)한다는 117구까지의 결사(結詞)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
봉래는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동래[현재 부산광역시]의 별칭이다. 이 작품에는 조선 고종 때 정현덕이 동래 부사로 재임 시 동래의 명승지를 두루 다니면서 보고 느낀 바를 중심으로 임기를 마친 이후에 저술을 완성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의 일을 회고하고, 항일 선열들을 추모하는 등 반일 감정과 호국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내용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부분은 서사로서 신선 세계를 뜻하는 봉래를 구경하면서 이를 말로 내니 「봉래별곡」이 되었다며 작품의 창작 동기를 밝혔다. 그리고 예로부터 동래가 신선(神仙)의 고장이라 했지만 “신선이란 말이 황당하다”며 동래를 이상적인 세계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대로 사실적으로 드러내겠다는 서술 방향을 제시했다.
둘째 부분은 정현덕이 금정산성부터 태종대까지 동래의 뛰어난 경치를 보고 감상한 내용이다. 금정산성→ 범어사→ 소하정→ 유선대→ 온천 약수→ 배산→ 정원루→ 안락 서원→ 황령봉 등에서 본 대마도·해운대·몰운대·영가대·자성대→ 증대성에서 본 구봉봉·두모포·초량포·왜관→ 다대진→ 강선대→ 절영도→ 태종대에서 본 오륙도·우암포 등의 풍경과 감상을 서술하였다. 특히 영가대와 왜관을 보면서 임진왜란 때의 잔학상을 연상하여 왜적에 항거한 선열들을 추모하고, 일본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마지막 결사에서는 신선의 고장이라는 봉래에서 신선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선경(仙境)임이 확실하다”며 동래의 풍광을 예찬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행을 마무리한다.
[특징]
기행의 여정이 순차적으로 제시되는 기행 가사의 일반적 구성을 따르지 않고, 동래 부사 재임 시에 여러 차례 동래를 구경한 경험을 각각의 지점, 특히 산을 중심으로 시선의 이동에 따라 서술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의의와 평가]
「봉래별곡」은 부산 지방을 유람하고 지은 유일한 기행 가사로 부산의 옛 지리, 지명, 경계, 누각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측근으로 쇄국 정책을 지지했던 작가 정현덕은 부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 침략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일본의 진출과 침략을 차단할 수 있는 최초 방어진으로서의 부산의 지정학적 위상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부산에 대한 정치적 이해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의 의의도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