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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8519
한자 瓦余-
영어의미역 Yayeo Village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와여 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전영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자연 마을
변천 시기/일시 1895년 - 기장군 상서면 와여동
변천 시기/일시 1914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와여리
변천 시기/일시 1973년 - 경상남도 동래군 철마면 와여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와여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86년 - 경상남도 양산군 철마면 와여리에서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와여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3월 1일 - 경상남도 양산군 동부출장소 철마면 와여리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로 개편
자연 마을 와여 마을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와여 마을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에 있는 자연 마을.

[명칭 유래]

옛 이름은 애몰이며 이후 한자명으로 아여(阿餘)라 하였다. ‘애몰’의 ‘애’는 ‘작다’라는 뜻이며, ‘몰’은 ‘산마루’이니 작은 산마루로 해석할 수 있다. 한자명 아여[언덕 아(阿), 남을 여(餘)]는 현재도 쓰이는데, 이때 여(餘)는 건너갈 월(越)을 표기한 것으로 ‘언덕 너머’, 또는 ‘작은 산마루 너머’라는 뜻이 된다고 본다. 이후 이곳에 정착한 오씨 일가가 기와집 촌을 형성하면서 ‘아여(阿餘)’가 기와 와(瓦)를 써서 와여(瓦余)로 변하였다고 전한다.

[형성 및 변천]

와여 마을 남동쪽 나한봉 야산에서 고려 토기가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고려 때도 이곳에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차성가(車城歌)」에 “구로곡(龜老谷)이 수려하니 와여(瓦余)에 다사(多士)하고”라고 하여 와여란 지명이 나온다.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1904]에 의하면, 당시 기장군 남면 와여동에는 40호가 살고 있었다. 집은 모두 초가 3~4칸 집이다. 오원재(吳元才), 오운중(吳云中)의 집이 와가(瓦家) 4칸이다. 초가 4칸 집은 11호이다. 김씨[22호]가 가장 많이 살고, 다음이 오씨[10호] 순이다.

『기장현읍지(機張縣邑誌)』[1831]에 상서면 와여리(瓦餘里)로 기록되어 있다. 『경상남도 기장군 가호안』에는 상서면 와여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행정 구역 통폐합으로 동래군 철마면 와여리가 되었다. 1973년 양산군에 병합되었다. 1995년 3월 1일 기장군의 복군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와여 마을이 되었다.

[자연 환경]

와여 마을 북쪽은 북동쪽 거문산에서 북서쪽 공덕산으로 이어지는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서쪽 경계부로는 공덕산 줄기가, 동쪽 경계부로는 거문산의 줄기가 남으로 뻗어 사방이 산지로 둘러 싸여 있다. 동서 방향의 두 산지 사이에 북서쪽 공덕산 일대에서 발원한 소하천과 북서쪽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흐르며, 리의 남쪽에서 합류해 철마천으로 유입하며, 남쪽의 철마천 주변은 비교적 넓은 평지를 이룬다.

[현황]

와여 마을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224번지 일대 1통 지역에 자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철마면의 중심지이다. 금정구 선두구동에서 기장군 철마면 장전리를 지나오다 보면 철마면사무소 앞 삼거리가 나오는데 이곳이 와여 마을 입구이다. 이곳에는 철마파출소, 철마우체국, 철마초등학교, 철마면사무소, 철마농협 등이 있다. 마을 안에 와여 마을 회관이 있는데 와여 청년 회관과 함께 사용한다.

와여리 새마을 회관 앞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100m쯤 곧바로 가면 넓은 주차장 조금 위에는 동래학원 설립자 우창(隅倉) 오태환(吳泰煥)의 생가인 고가(古家)가 있는데, 기장군 지정 기념물로 집의 구조는 평면 형태가 동서로 긴 T자형인 남향집으로 구조가 매우 독특하다. 마을 북쪽으로 제일 높은 곳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무공을 세운 김일개(金一介)를 포함한 6위의 신위(神位)를 모신 의열사(義烈祠)가 있다.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314번지,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317-5번지에 있는 의용당(義勇堂)은 구산단소(龜山壇所)로도 불리는데, 해주 오씨(海州吳氏) 판관공파의 재실이며, 임란 시기 공을 세운 충렬사 24별전공신인 오홍(吳鴻)·오춘수(吳春壽) 두 분을 모시는 사당이다. 1953년 철마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실로도 사용하였다. 기장군 철마면 와여리 336번지에 있는 모원정(慕源亭)은 문행(文行)으로 유명하였던 숙질간인 김상영(金相英)과 김성련(金誠鍊) 두 사람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었다. 김성련의 할아버지는 김광우(金光禹)로 18세기 기장의 문장가 신오(辛澳)의 수제자였으며, 「차성가」의 원작자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와여 마을은 본래 거문산(巨文山) 아래에 모여곡과 대앗밭에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가 차츰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암모[안동네]와 듬모[끝동네] 두 갈래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당산제가 두 곳에서 치러졌다. 와여리 동리[듬모] 할배 당산과 할매 당산이 그것이다. 할배 제당[듬모 제당]은 마을에서 마을에서 동북쪽 약 300m 지점의 산록에 위치하고, 할매 제당[골목 장군 제당] 동남쪽 약 50m 지점의 구릉 위에 위치한다.

할배 제당은 1990년, 할매 제당은 1981년 1월 18일에 건립됐다. 두 제당 다 담장이 없고, 할배 제당 주변에는 소나무가 있으며, 할매 제당 주위에는 잔디밭이고 오른쪽에 작은 귀목 1그루가 있다. 제의는 1년에 한 번, 매년 음력 정월 14일 밤 자정경에 올린다. 특기 사항으로 할매 제당의 뒤에 거릿대를 세움으로써 할매와 거릿대 장군[골목 장군]이 혼합되어 할매 제당을 거릿대 제당이라 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제당 할배제에는 쌀밥을 지어 올리며, 제당 할매제에는 오곡밥을 지어 올리고, 제의 뒤에는 오곡밥을 당사 주위에 뿌린다.

와여리 서리[안모] 할배 당산은 마을에서 서북쪽 약 100m 지점 산록에 위치한다. 건립 연대는 1940년 2월 9일이다. 제당 주위에는 돌담장이 있고, 제당 뒤 4m 지점에 소나무[70여 년생] 1그루가 있으며, 담장 밖에는 잔솔이 많다. 제의 날짜는 옛날에는 음력 정월 14일 밤 자정이었으나, 요사이는 1년에 1회 보름날 초저녁에 거행한다. 특기 사항으로 헌관이 제당 할배제를 지낸 뒤 촛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두고 집으로 내려왔다가 이른 아침에 제당으로 올라가 촛불을 확인하는데, 초가 다 타고 없으면 그 해에는 마을이 편안하다고 점친다. 마을의 주업은 벼농사이며, 부업으로 미나리와 당근 등을 재배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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