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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국어학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7566
한자 嶺南國語學會
영어공식명칭 The Society of Korean Linguistics in Youngnam Province
분야 문화·교육/교육,구비 전승·언어·문학/언어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두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학술 단체
설립자 정신득|우신출|장지완|김갑수|장삼식 등
설립 시기/일시 1945년 10월연표보기 - ‘한얼 몯음’으로 조직
개칭 시기/일시 1946년 12월연표보기 - 한얼 몯음에서 영남국어학회로 개칭

[정의]

해방 직후 부산 지역에서 국어를 보급하기 위하여 설립된 학회.

[개설]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이 한국인의 민족혼을 빼앗기 위하여 한국어의 사용과 교수를 금하고, 일본어 중심의 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한글을 아는 이도 쓰는 이도 적어져 민족정신을 흐리게 하였고, 자주 독립 사상을 좀먹게 하였다. 이를 우려한 선각자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글과 말의 계도와 보급에 전력하였으며, 광복을 맞아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한글의 지도와 보급은 부산을 비롯한 경상남도 지방이 다른 어느 곳보다 활발하였고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것은 울산 태생이며 부산에 교편을 잡은 바 있는 최현배(崔鉉培)를 비롯한 김해 출신의 한뫼 이윤재(李允宰) 등 이 고장 출신의 많은 한글 학자들의 희생적인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이 되자 일찍이 1945년 8월에 홍영식(洪永植)의 지도 아래 박지홍, 최상학 등이 주동이 되어 국어동호회(國語同好會)를 조직하여, 동래에 있는 명륜초등학교를 빌어 한글 맞춤법 강습회를 연 것이 부산에서 있은 첫 번째의 국어 운동이었다. 1945년 9월 상순에는 이형우, 이동선, 박지홍 등이 수정동의 전 동아중학교 자리에 있던 공생원 유치원을 빌어 학생문화동지회(學生文化同志會)를 조직하고, 이형우가 회장, 이동선이 부회장, 박지홍이 국어 부장을 맡고, 이형우와 박지홍은 국어를 담당하고, 다른 사람은 영어를 담당하여 10월 중순까지 공생원과 초량초등학교에서 한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11월에는 경상남도 학무과가 최현배를 강사로 초빙하여,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시내와 경상남도 내의 초·중등 교사를 대상으로 7일간 국어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중등학교 국어 교사들은 1945년 겨울에 중등학교 국어교육연구회를 조직하여 매주 또는 매월 각 학교를 순회하면서 연구 수업과 토론회를 가져 국어 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본회는 나진석, 배길기가 주동이 되어 조직하였는데, 시내 전 중등학교 국어과 교사가 회원이 되었고 윤인구(尹仁駒)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단체가 영남국어학회이다.

[설립 목적]

영남국어학회는 광복 후 국어 보급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1945년 10월에는 정신득, 우신출, 장지완, 김갑수, 장삼식 등이 ‘한얼 몯음’을 조직하여, 맞춤법 보급과 한글 전용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관지 『한얼』을 발간하였다. ‘한얼 몯음’은 옛 초량상업학교의 교사를 빌어 사무소를 차리고, 수산전문학교 교수들의 지원을 받아 ‘배달 학원’이라는 야간 중학교를 설치하였다. 이때 참여한 교사는 김정한, 김순봉, 류백사, 이정한, 박지홍, 장삼식, 장갑상, 박종우, 정신득, 류방산, 정요수, 우신출 등이었는데, 류백사, 정신득, 정용수는 『중등 국어 독본』을 엮었으며 박지홍이 책임 교정을 하였다.

1946년 12월에 ‘한얼 몯음’은 발전적 해산을 하고, 영남국어학회로 개편하였다. 이 때 진용은 대표 위원이 류백사였고, 최현배·방종현·이고루·김다운·홍영식이 상임 위원이었으며, 서울 연락처 신영철·최영해, 대구 연락처 김계원, 서무 정신득·류방산, 연구 장삼식·이철우, 출판 박지홍 등이었다. 최상학, 홍남식, 염주용[문예신문사 사장]이 입회하여 활기를 띠었다. 해체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맞춤법 보급과 한글 전용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관지 『한얼』을 발간하였다. 기관지 『한얼』은 정음사(正音社)에서 맡아 계속 간행되었는데 제1호는 1946년 5월 1일에 장삼식의 편집으로, 제2호는 1947년 3월 15일, 제3호는 1947년 6월 15일에 박지홍의 편집으로 간행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방 후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대표 위원, 상임 위원, 각 연락처, 서무, 연구, 출판 등 전문 조직을 갖추고, 『한얼』 학회지 발간과 더불어 서울과 대구 등 여러 지역의 회원들이 함께 참여하는 국어 학회로서 오늘날 못지않게 학회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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