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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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仁駒 |
영어음역 | Yun Ingu |
분야 | 문화·교육/교육,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산성로 872[장전동 산30]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차철욱 |
[정의]
부산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총장을 지낸 부산 출신의 교육자.
[가계]
본관은 파평(坡平). 할아버지는 동래 부사 윤홍석(尹弘錫)[1843~1902]이고, 아버지는 윤상은이다. 큰아버지는 동래 부사와 경상 우도 관찰사를 지낸 윤필은과 고성 군수 윤명은이다. 작은아버지는 1920년대 구포청년회를 조직하여 이끈 사회 운동가 윤영은이다. 형제는 윤연숙, 윤연학, 윤현표, 윤학자, 윤현성이다. 사촌[윤필은의 아들]은 사회 운동가 윤현태와 상해 임시 정부 재무 차장을 지낸 윤현진이다.
[활동 사항]
윤인구(尹仁駒)[1903~1986]는 부산 구포 출신으로, 구포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 에 다니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현 부산진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14세 때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나 병으로 휴학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17년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동래 시장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난 직후 학교 선배인 서진랭(徐鎭冷)이 「독립 선언문」 50통을 주며 구포에 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하였다. 이에 윤인구는 「독립 선언문」을 뿌리면서 만덕 고개를 넘어 구포에 이르러 당숙인 윤정은(尹正殷)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독립 선언문」을 전했다. 며칠 후 구포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 일로 윤정은과 재종형 윤경봉(尹敬奉)이 체포되어, 윤정은은 이듬해 68세의 나이로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다.
3·1 만세 운동 후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윤인구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두고 1920년 1월 초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예비 학교에 다녔다. 4월 아버지 윤상은이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자 윤인구도 명교중학(名敎中學)에 편입하였다. 1920년 기독교 학교인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로 전학하였고, 2년 뒤 고등학부 문예과에 진학하였다. 1926년 윤인구는 신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메이지학원 신학부 본과에 입학하였다. 그해 여름방학 때 부산으로 와 초량 삼일교회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여름 성경 학교를 열었다. 여기서 나중에 부인이 된 방덕수를 만났다. 도쿄 대지진이 일어나자 피난민 구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29년 26세 때 대학 교수의 영향과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프린스턴신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30년 석사 학위를 받고 영국으로 건너가 이듬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대학 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1931년 주기철 목사의 주례로 방덕수와 혼인하였다. 결혼 직후 경상남도의 교회를 옮겨 다니면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동시에 마산복음농업실수학교(馬山福音農業實修學校), 조선신학원(朝鮮神學院) 등의 학교도 세워 운영하였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극에 달한 1944년 조선신학원 교장을 사임하고 김해 대동의 산에서 벌목 일을 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미군정 하의 경상남도 내무부 학무과장이 되었다. 당시 윤인구는 가장 시급한 문제가 대학 설립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1946년 5월 15일 미군정청 문교 부장인 유억겸(兪億兼)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아 부산수산전문대학을 통합하여 수산과 대학과 인문과 대학으로 이루어진 국립부산종합대학교를 출범시켰다. 그해 8월 미국인 베커(Becker) 박사가 총장으로 취임하였으나 기존의 부산수산전문대학 학생들의 반발로 학교 운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7년 베커가 미국으로 돌아가 버리자 그해 7월 16일 경상남도 학무국장이던 윤인구가 부산대학교 인문과 대학 학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1948년 5월 종합 대학의 한 축을 이루던 수산과 대학이 부산수산대학으로 분리되어 나가면서 국립부산종합대학교는 해체되고, 인문과 대학은 국립부산대학이라는 교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에 윤인구는 그해 11월 대학 재건에 매진하기 위해 경상남도 학무국장을 사임하고, 이듬해 10월 부산대학건설위원회를 도지사 중심으로 개편하여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 11월 23일 윤인구는 부산대학 학장에 임명되었다. 6·25 전쟁 중이던 1953년 마침내 윤인구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부산대학은 문리과 대학, 법과 대학, 상과 대학, 공과 대학, 약학 대학, 의과 대학 등을 갖춘 종합 대학으로 재탄생하여 윤인구는 11월 26일 국립부산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윤인구는 부산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1957년 서구 대신동에 있던 캠퍼스를 현재의 금정구 장전동으로 옮겼다. 1959년 11월 25일 초대 총장의 임기가 끝나자 교수 회의 재임명 요청을 거부하였고, 1960년 4·19 혁명 이후 사표를 제출하였다. 이듬해 연세대학교 총장이 되어 4년간 재임하였다. 귀향 후 신학 교육을 위해 장로회부산신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는 등 말년까지 교육에 헌신하다가 1986년 세상을 떠났다.
[묘소]
윤인구의 묘는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산 18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교육회의 특별 공로상[1958년]과 부산시 문화상[1959년]을 수상하였다. 부인 방덕수는 부산대학교 설립과 발전을 위해 노력한 윤인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유고를 정리하여 1988년 『윤인구 박사 그 참다운 삶과 정신』을 출간하였고, 재산을 희사하여 1991년 4월 부산대학교에 인덕관을 설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