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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930
한자 敎科課程
영어의미역 Curriculums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안경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4년 4월 20일~ 1963년 2월 15일 - 교과 과정 시기

[정의]

교육 과정령이 제정 공포되기 전 부산 지역 각 학교의 교과목 및 기타 교육 활동의 편제.

[개설]

교육 과정사에서 교과 과정 시기는 1954년 4월 20일 ‘교육 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제정 공포된 때부터 1963년 2월 15일 ‘교육 과정령’이 제정 공포된 때까지를 말한다.

[교수요목 시기:지식 중심 교육 과정]

교육 과정사에서 광복 직후부터 1954년 문교부령 제35호로 공포된 교과 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나오기까지의 시기를 교수요목(敎授要目) 시기라고 한다. 교수요목이란 교사가 학생에게 가르칠 교수 내용의 주제 또는 제목을 열거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법령 형태의 체계를 갖춘 교과 과정과 구별하기 위하여 불린 명칭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미군이 그해 9월 8일에 인천에 상륙하고 중앙청에서 조선총독부의 항복을 받아 같은 해 9월 11일에 미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 학무 당국은 동년 9월 17일에 일반 명령 제4호로 그해 9월 24일을 기하여 공립의 모든 국민학교가 교육을 재개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부산은 한국인 학교 20개 학교를 일제히 개교하였다.

이때 우리 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불식하고 민주주의를 빨리 배워서 평화로운 민주 국가를 건설할 것을 열망하여, 새 나라의 일꾼이 될 학생들의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일본어를 가지고 일본이 만든 교육 내용으로 교육해 왔던 직후였기 때문에 가르칠 내용이 막연하였고, 가르칠 용어도 익숙하지 못하여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때에 미군정 당국은 일반 명령 제4호를 개정한 법령 제6호로 ‘교육 조치’를 1945년 9월 18일에 공포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 학교에서의 교육 용어는 조선어로 함. 조선어로 상당한 교육 재료를 활용할 때까지 외국어를 사용함도 무방함’이라고 규정하였으며, 과정에서는 ‘조선의 이익에 반하는 과목은 교수하거나 실습하지 아니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에 일선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한글을 먼저 익히도록 하였고 교과서가 필요하였다.

한글 보급은 해방 직후부터 조선어학회가 주축이 되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교과서가 없어서 공부를 못 하는 초·중등학교의 시급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하여 교육계, 문필계, 언론계 등 여러 방면의 협력을 얻어 우선 임시 국어 교재를 엮기로 한다’고 결의하고 국어교과서편찬위원회를 두어, 짧은 기간에 한글의 기초를 배우기에 알맞은 『한글 첫걸음』을 편찬하여 미군정청 학무국으로 하여금 발간 보급하게 하였다.

부산에서는 한글에 조예가 깊었던 정신득, 박지홍, 나진석, 김계원, 그리고 승려 조병구 등이 한글 강습회의 주축이 되었다. 한편 진주의 한글학자 유열을 초청하여 부산과 경상남도 교사들을 모아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한글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이후 조선어학회에서는 『초등 국어 교본』 상(上)-1·2학년용, 『초등 국어 교본』 중(中)-3·4학년용, 『초등 국어 교본』 중(中)-5·6학년용 등을 편찬하여 한글 보급에 열성을 다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 당국은 초·중등학교의 교과 편제와 시간 배당을 정한 다음에는 교과별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즉 교수 내용을 정하는 일을 서둘렀다. 그리하여 교수요목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교수요목을 정하는 한편 교과서 편찬을 하였다.

1946년 11월 15일에 설치된 교수요목제정위원회가 발표한 교수요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과의 지도 내용을 상세히 표시하고 기초 능력을 배양하는 데 주력하고, 둘째, 교과는 분과주의를 채택하고 체계적인 지도와 지력의 배양에 중점을 두었으며, 셋째, 홍익인간의 정신에 입각하여 애국 애족의 교육을 강조하며 일제 잔재를 제거하는 데 각별히 노력하였다.

이상의 교수요목은 교과서 발행이 시급하였기 때문에 이를 위한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를 불식하려는 노력이 두드러져 한글 전용과 우리말 도로 찾기 및 우리말 용어 제정 등으로 발전하였다. 1946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2학기제와 6-6-4제 또는 6-3-3-4제의 단선형 새 학제가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51년 9월부터 6-3-3-4제의 현 학제로 정착되는 과정과 더불어, 각급 학교의 교육 과정 제정이 시급하여 우리 정부는 교육 과정 제정 작업을 서둘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어 미군정 시 제정된 교과목과 교수요목에 따라 교육하였으며 교과서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교과서도 점차 간행이 되어 전 아동이 교과서를 가지고 공부하게 되었으며, 교사들의 연수 활동도 활발하여져서 6·25 전쟁 직전에 부산의 초등 교육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새 교육 운동:생활 중심 교육]

당시 미국의 민주주의 교육 사상이 보급되어 부산에도 영향을 끼쳤다. 부산의 교육자들이 일본 서적을 중심으로 새 교육을 탐색하면서, 1952년 1월에 김성태(金性太)의 라디오 프로그램 ‘커리큘럼 강좌’와 그해 9월부터 시작된 영선국민학교에서의 미국 교육 사절단의 워크샵 등의 영향을 받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부산의 일부 국민학교에서는 부분적으로 교수 형태를 아동 중심, 노작 교육 형태로 전환하여 연구 수업을 중심으로 한 지도 기술 발전에 힘쓰기도 하였다.

부산의 새 교육 연구와 실천의 주축은 동광국민학교이다. 1951년 3월 20일에 문교부령 제17호로 연구 학교 규정이 공포되고, 이어 그해 4월 10일에 부산의 동광국민학교와 전주의 풍남국민학교가 연구 학교로 지정되면서 새 교육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 당시 동광국민학교는 김두성 교장이 새 교육을 탐색하면서 이의 실천에 뜻을 두고, 장학사 정정봉을 교감으로 임명하여 새 교육의 연구 실천에 들어갔다.

당시는 본 교사를 미군에게 징발당하고 용두산 위에 천만 교실을 건립하여 학교를 운영하는 중이어서 연구 추진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새 교육에 대한 의지가 결집되어 동광국민학교에서 ‘교육 과정 개선’을 주제로 하여 1950년은 사색기, 1951년은 준비기, 1952년은 시행기, 1953년은 검토기, 1954~1955년은 충실기로 정하여 단계적 실천을 해 나갔다.

교육 과정 개선의 방법으로는 다섯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교과 커리큘럼의 장점을 채택한다. 둘째, 경험 커리큘럼의 진보성을 취입한다. 셋째, 학습 심리를 활용한다. 넷째, 구체적인 교육 목표를 세운다. 또한 교육의 전체 계획에 의하면, 1~2학년은 생활 커리큘럼, 3~6학년은 교과 커리큘럼으로 하고, 생활 지도는 가이단스라 하여 자유 연구, 가이단스, 자치 활동, 홈룸, 봉사 활동, 클럽 활동으로 조직하였다. 이 계획에 의하여 조직된 교육 과정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획기적인 구상이라 할 만큼 혁신적인 것이어서 연구 성과의 전국 공개 보고를 통하여 전국에 파문을 던졌다.

이로써 부산 시내 각 학교에서는 뜻있는 교사들이 코아 커리큘럼이나 생활 커리큘럼 등으로 교육 과정을 재구성하여 아동 중심의 생활 교육을 실천하게 되었고, 당시 부산은 새 교육의 중심지로서 전국에서 교육 시찰자들의 내방이 이어졌다. 이것은 뒷날 문교부의 교과 과정 제정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고, 우리나라 초등 교육에 아동 중심이나 생활 중심 교육의 씨앗을 부린 귀중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동광국민학교의 연구는 행정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부산시 교육위원회에 부산시 교육연구위원회가 조직되어, 새로운 사조에 기반을 둔 『부산시 교육 기저 계획』이 만들어져 부산 시내 각 학교에 배부되었다. 각 학교는 『부산시 교육 기저 계획』에 의거하여 새 교육 체제의 학교 교육 전체 계획을 수립하여 교육의 개혁을 실천하였다. 이때 만들어진 『부산시 교육 기저 계획』은 ‘지역 사회의 과제와 학생들의 원만한 발달을 고려하여 유기적, 관련적, 전체성에 입각한 학생들의 생활에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교과 과정 시기:경험 중심 교육 과정]

6·25 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의 각 학교는 국군이나 미군에게 건물을 제공하고, 인근의 교회나 공회당, 그리고 개인의 상점이나 창고 등에서 학급 단위로 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피난민이 몰려들자 원교 단위로 피난 학교를 개설하고 각 국민학교에 병치하여 교육하였다.

6·25 전쟁을 극복하기 위하여 문교부는 1951년 1월 7일 부산시청 내에 사무실을 두고, 그해 2월 26일자로 ‘전시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을 발표하여 일부 중단된 지역의 교육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급한 대로 국민학교 교재로 『전시 생활』이, 중학교 교재로 『전시 독본』이 제공되었다. 1954년은 ‘교육 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 공포되었으나 교과 과정이 아직 초안 단계에 있었고, 새 교과서는 아직 나오지 않은 때여서 실질적으로 교육 과정의 공백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는 부산시 교육연구위원회로 하여금 『각과 학습 지도 지침』을 편찬하게 하고, 이를 학교에 배부하여 교육 과정 운영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각과 학습 지도 지침』에는 각 교과의 목표, 학습 내용, 학년별 지도 방법, 학습 지도의 구체적 전개 사례, 평가 등과 능력표, 교재 분류 일람표가 수록되어 있으며, 교과에 따라서는 단원 일람표와 경험 요소표, 학습 지도안 작성 요령 등이 나와 있는 등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게 제작되어 있다. 또한 『각과 학습 지도 지침』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학습 자료 단원을 제작하여 배부하였다. 이 학습 자료 단원의 명칭은 『학습 자료』였고, 1956년 2월에 교과별로 부산시 교육연구소[부산시 교육위원회의 후칭]의 전문 위원들, 즉 현직 교사들이 작성하였다.

이로써 부산시 교육위원회는 1954년에 『부산시 교육 기저 계획』을 작성·배부하여 학교 교육 전체 계획 수립의 지침을 제공하였고, 같은 해에 『각과 학습 지도 지침』을 작성·배부하여 교육 과정의 지역화에 힘썼으며, 이를 뒷받침하고 각 학교의 교육의 발전을 촉진하고자 『학습 자료』를 1956년에 제작, 배부함으로써 학교 교육에 일련의 체계적인 자료 제시를 하였던 것이다.

1949년 12월 31일에 제정 공포된 『교육법』 제155조에 ‘대학·사범 대학·각종 학교를 제외한 각 학교의 학과·교과는 대통령령으로, 각 교과의 교수 요지·요목 및 수업 시간 수는 문교부령으로 한다’고 되어 있어, 이에 따라 문교부는 교육 과정 시간 배당 및 교과 과정을 새롭게 문교부령으로 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1953년부터 본격적인 개정에 착수하였다.

이 작업은 1951년 3월 30일에 제정된 문교부령 제16호에 의한 교육과정연구위원회와 1950년 6월 2일의 문교부령 제9호에 의한 교수요목심의회 규정에 의거하여 이루어졌다. 1여 년의 개정 작업으로 1954년 4월 20일에 문교부령 제35호로 공포하였고, 이것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사범 학교 교육 과정 시간 배당 기준령이었다. 이후 다시 1955년 8월 1일자로 문교부령 제44호로 국민학교 교과 과정이 공포되었다.

1955년에 제정된 교과 과정의 특색은 종래의 지식 중심의 교과 과정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경험과 생활을 중시하는 교과 과정을 편성하도록 노력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실생활에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 습관 등의 지도가 가장 중요한 교육 목표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러한 목표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문교부는 새로운 교과 과정에 따라 새 교육 사조에 맞는 국정 교과서 편찬이 시급하다고 판단하여, 1955학년도부터 연차적으로 개편 또는 신규 편찬에 힘을 쓴 결과 1958년 『사회과 부도』만 남기고 모두 발간하였다. 교과 과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때의 국정 교과서는 지역성 고려가 불충분하고 또한 어린이의 발달 단계에 알맞지 않은 면이 있어, 부산의 현장 교사 가운데는 교과서를 재구성하여 지도하는 연구와 작업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교육 내용에 대한 올바른 생각을 널리 알리고 필요성을 인식하도록 하는 계몽적인 효과가 있었다.

문교부령으로 정해진 시간 배당 기준은 1954년 부산시 교육위원회의 안과 비슷하였다. 즉, 1학년 국어는 부산안이 30%인데 문교부 기준령은 25~30%로 되어 있고, 다른 교과도 거의 비슷한 비율인데, 다만 부산안은 연간 40주로 하여 1학년이 총 920시간이었고, 기준령은 35주로 연 840시간으로 되어 있어 부산의 선진적인 연구가 이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교과 과정 시기의 부산 교육은 아직 교육 과정이란 명칭이 사용되기 전, 6·25 전쟁으로 교육이 혼란기에 있을 때 부산시와 교육 연구 단체, 일선 교사가 협력하여 나름대로의 일선 학교 교육 활동의 준거가 될 여려 편제를 마련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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