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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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Stone-lined Tombs |
이칭/별칭 | 횡구식 석실묘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된 통일 신라 시대의 묘제.
[개설]
앞트기식 돌방무덤[橫口式 石室墓]은 무덤을 만든 후 입구를 통해 여러 명을 매장할 수 있는 묘제로 6세기에서 9세기까지 만든 무덤이다. 이것은 수혈식 석곽 구조에 횡혈식 석실(橫穴式 石室)의 장법을 수용하여 입구를 만든 묘제로, 시신을 무덤 안으로 들여놓기 위한 입구가 있기 때문에 하나의 무덤에 여러 명을 매장할 수 있는 점에서 횡혈식 석실과 같으나 현실(玄室)[널방]로 들어가는 무덤 안길은 없다. 그리고 묘도·입구·현실·현실 내의 시상(屍床)[시신의 받침, 관대라고 함]·부장품의 5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묘도와 입구는 석실 바깥에서 현실까지 주검과 부장품을 이동하는 공간이고, 현실은 주검을 안치하며 부장품을 격납하는 공간이다. 매장 구조가 동일한 앞트기식 돌방이지만, 석실이 조성된 입지·규모·시기와 지역에 따라 각각의 요소는 다양하고 가변적이다.
앞트기식은 매장 주체 시설과 봉토 축조가 완료된 후 묘도와 입구를 통하여 주검을 안치하고 입구와 묘도를 폐쇄함으로써 매장 행위가 종결된다. 앞트기식 돌방무덤은 봉토 축조라고 하는 집단의 노동력이 투여된 후에 매장이 행해지기 때문에 새로운 장례 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묘제를 탄생시켰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분포와 변천]
부산 지역에도 6세기 전반이 되면,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란 새로운 묘제가 만들어진다. 금정구 두구동 임석 고분군, 북구 덕천동 고분군, 해운대 군부대 내 좌동 고분군, 좌동 고분군, 송정동 고분군, 청강리 고분군, 두명리 고분군, 가동 고분군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중 두구동 임석 고분군·덕천동 고분군·해운대 군부대 내 좌동 고분군·좌동 고분군은 고분군을 이루는 무덤이 대부분 앞트기식 돌방으로 이루어졌고, 처음부터 앞트기식 돌방이 만들어지면서 고분군이 형성되었다.
이 외의 고분군은 구덩식 돌덧널[竪穴式 石槨]과 앞트기식 돌방으로 이루어졌는데, 구덩식 돌덧널이 먼저 만들어지고, 후에 앞트기식 돌방이 만들어지면서 주 묘제가 앞트기식 돌방으로 바뀐다. 6세기 후반이 되면, 구덩식 돌덧널로만 이루어진 고분군은 사라지고 앞트기식 돌방이 보편적인 묘제로 정착한다. 양산·창녕 등지의 앞트기식 돌방은 규모가 커지지만, 부산 지역은 대부분 중·소형이고 추가 매장도 1~2회로 많지 않다. 8세기 후반 이후에는 앞트기식 돌방의 조영이 현저하게 쇠퇴하고, 9세기 말~10세기 전반에 이르러 추가 매장이 사라지며 석곽으로 대체되면서 자취를 감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