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8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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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華僑 |
영어의미역 | Chinese Living abroad |
이칭/별칭 | 구화교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개항기,현대/현대 |
집필자 | 안미정 |
[정의]
개항 전후부터 1992년 한·중 수교 이전까지 한반도로 이주하여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중국계 사람들과 그 후손.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화교의 이주]
화교(華僑)에 대한 정의는 다양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화교라 함은 대개 1992년 한·중 수교 이전부터 한국에 거주하여 온 이른바 구화교(舊華僑)를 지칭한다. 한국 화교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을 기점으로 삼으며, 부산에는 1884년 청국 영사관이 설치되고, 1887년 청국 조계지를 획득하게 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즉 1884년 14명이었던 인구가 1890년에는 164명, 1891년에는 138명에 달했다.
1894년 청일 전쟁과 1910년 국권 강탈로 부산에 거주하던 화교들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고, 1913년에는 청국 조계지가 폐지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22년 부산항 제2 부두 매축 공사로 중국 산둥 성에서 많은 인력들이 대거 부산으로 유입하게 되어, 1925년 유입 인구는 542명에 달했다. 점차 증가하던 인구는 1931년 만보산 사건과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인해 급감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화교에 대한 조선인의 배척 감정이 조장되었고, 중일 전쟁은 이들을 적성(敵性) 국민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6·25 전쟁과 부산 화교]
광복 직후 미군은 화교를 연합국 국민으로 간주하였고 국내에서도 반일 투쟁의 연대 세력으로 화교를 인정했기 때문에 화교의 대우가 일제 하 ‘적성 국민’에서 ‘일등 국민’으로 달라졌다. 그러나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화교는 중화민국 국민이 되었고, 동시에 대중국 무역 통로가 막혀 교역이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6·25 전쟁 직후 화교 인구는 잠시 증가하였으나 지금까지 계속 감소 추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산은 이상과 같은 전국적 추세와 달리 6·25 전쟁을 기점으로 많은 화교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화교 피난민들은 부산에서 크게 세 군데에 모여 살았는데, 초량동 청관 거리 뒤편 영주동 공동묘지 자리의 충효촌(忠孝村), 거제리의 인애촌(仁愛村), 서면 일대의 신촌 등이 바로 화교 집단 거주지였다. 6·25 전쟁이 끝난 후에 주요 기관들과 지도자들은 다시 서울로 귀환하였으나 생활 기반을 잃은 피난 화교들은 부산에 그대로 거주하는 자가 많았다. 주거 환경은 열악할 수밖에 없어 양철 지붕, 나무판자 지붕을 이어 살았으며, 대개는 부두에 나가 단순 노동을 하여 번 돈으로 살았다.
[부산의 화교 현황]
1980년대 도시 재개발로 인해 화교들의 집단 거주 지역에 아파트와 빌딩이 들어서게 되자, 화교들은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도심 외곽의 아파트로 집단 이주하면서 일단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는 벗어났으나, 인구 감소 추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서면 신촌 화교들의 집단 이주지인 엄궁동 ‘로얄 화교 아파트’의 현재 화교 세대는 총 85세대 중 약 40세대에 지나지 않는다. 거주하는 화교들도 대개 고령에 이른 독거노인들이며, 남성은 1~2명에 불과할 뿐 거의 모두가 여성들이다.
2007년 부산화교협회의 호적부에 의하면, 부산에는 2,117명의 화교가 있는데, 주로 동구와 중구에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출신지는 산동성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지만, 하북성과 요녕성, 호북성과 강소성 등 출신들도 있다. 그리고 출생지를 기준으로 하면, 전체의 88.8%[1,879명]가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들이다. 2009년 기준 전국의 화교 2만 1698명 가운데 8%인 1,740명이 부산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