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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722
한자 統一民主靑年同盟結成準備委員會
분야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청년 운동 단체
설립자 김배영|김영광|양춘우
설립 시기/일시 1960년연표보기 -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이후연표보기 - 해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60 말~1961년 전반 - 민주민족청년동맹과 통합 논의 전개
최초 설립지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 서울특별시
지역 조직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 부산광역시
지역 조직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 대구광역시
지역 조직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 광주광역시

[정의]

1960년 4·19 혁명 시기에 부산과 서울 등지를 중심으로 결성된 진보적 청년 단체.

[설립 목적]

이승만(李承晩) 정권 아래서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진보적 청년들을 결집하고, 4·19 혁명으로 도래한 새로운 정치 국면에서 민주화 운동과 자주화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변천]

이승만 정권 하의 억압적인 정치 환경 아래서도 1950년대 중반 이후 진보적인 청년 학생들은 합법 또는 비합법적으로 여러 가지 형태의 서클을 형성하고 있었다. 1960년 후반에 이 가운데 성민학회와 통일청년회의 회원과 신진회의 일부 성원들이 합류하여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약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를 조직하였다.

성민학회는 진보당 출신의 박기출(朴己出)을 이사장으로 김배영, 김한덕, 김영옥 등을 중심으로 부산에서 발족하여 서울 등지에 조직을 꾸리고 있었다. 통일청년회는 국회 의원 김수선의 비서로 있던 김영광을 중심으로 우홍선 등이 속하였다. 신진회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서클로 양춘우 등이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4·19 혁명 시기의 급박한 상황 속에서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는 정식 결성 대회를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60년 하반기에 서울로 중앙 맹부를 옮긴 민주민족청년동맹[약칭 민민청]과 함께 활동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두 청년 단체의 통합 논의가 제기되었다. 이에 1960년 말 1961년 초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민주민족청년동맹의 통합은 거의 성사 단계에 이르렀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두 단체의 관련자 대부분이 투옥되거나 수배된 탓에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는 김배영을 통해 사회당의 중심인물인 최백근과 관계를 맺으면서, 사회당과 연계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대 중앙 간사장은 우홍선이었으며, 서울 이외에 부산 경남과 대구 경북 및 전라남도에서 조직 활동이 활발하였다.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의 주요 활동은 통일 운동을 확산시키고 통일 운동 단체의 결성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먼저 1960년 말부터 시작된 대학 민족통일연맹의 결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한편으로 1961년 2월 25일 통일 운동 단체로는 8·15 이후 최대의 민간단체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사회당, 민족건양회, 민주민족청년동맹과 함께 중심 단체가 되었다. 이어서 1961년 봄에 전개된 한미 경제 협정 반대 투쟁과 2대 악법 반대 투쟁에 참여하였다.

[의의와 평가]

4·19 혁명 시기 진보적 청년의 결집 단체로 대표적인 진보적 청년 단체로서, 민주화 운동과 자주적 통일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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