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7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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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土器- |
영어의미역 | Pottery kil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부터 통일 신라 시대의 토기를 구운 가마.
[개설]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 시대까지의 토기 가마는 구덩이를 판 뒤 구덩이 안에 땔감을 깔아 그 위에 말린 토기를 놓고, 토기 사이에도 땔감을 넣은 후 진흙이나 다른 것으로 덮어 불을 피워 토기를 굽는 구조였다. 기원전 1세기에 와질 토기(瓦質土器)가 생산되면서 가마 구조에 큰 변화가 나타난다. 와질 토기는 평지에 구덩이를 어느 정도 깊이로 파고 천장을 덮어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데, 열이 가마 밖으로 나가지 않게 천장을 덮어 씌웠다.
[부산 지역의 토기 가마]
부산 지역에서 확인된 토기 가마로는 기장군 명례리 토기 가마터, 일광면 청광리 산3번지의 에코 파크 조성 사업 부지 가마터, 정관읍 가동 유적의 가마터, 금정구 두구동 임석 유적의 가마터 등이 확인되었다. 명례리 도야 마을과 청광리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아궁이의 길이가 길고 소성실(燒成室) 길이가 짧은 다소 특이한 형태이다. 아궁이와 소성실의 연결이 단을 이루고 길이가 270㎝로 짧으며, 평면 형태가 장타원형인 점 등은 6세기 이후의 신라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와 공통점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는 5세기 후반 이후의 것이고, 그 이전에 조업한 토기 가마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히 무덤에 많은 수량의 토기를 부장한 4~5세기의 토기 가마는 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향후 조사가 기대된다. 그리고 신석기 시대부터 삼한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토기 가마에 대한 조사도 전무한데, 이 부분도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구조와 형태]
부산 지역에서 조사된 토기 가마의 예가 매우 적어 가마의 구조와 형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길이가 긴 장방형과 소성실 바닥의 경사도가 낮은 구조에서 소성실 길이가 짧아지고 가운데의 너비가 넓어져 평면 형태가 고구마 형태를 이루며, 아궁이와 소성실 사이에 단이 생기는 구조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마가 한곳에 집중해 여러 기가 동시에 조업한 양상은 발견되지 않고, 1기 내지 2기가 조업한 형태로 대규모로 생산은 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곧 소규모 단위로 토기를 생산하여 주변 지역의 마을과 무덤의 부장품으로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기장군 명례리 토기 가마터에서는 연질 토기(軟質土器)도 확인되어 한곳의 토기 가마에서 도질 토기와 연질 토기를 같이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 가마가 1기 내지 2기로 조업한 예는 향후 토기의 생산과 공급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