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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6589
한자 古村里遺蹟
영어의미역 Remains in Gochon-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155-2
시대 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홍보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유적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10월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12월~2005년 5월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2007년|2008년연표보기 - 경남문화재연구원·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원소재지 고촌리 유적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155-2 일원
출토 유물 소장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 4동 948-1지도보기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遺構)가 확인된 복합 유적.

[위치]

고촌리 유적(古村里遺蹟)은 동래에서 기장으로 연결되는 국도 14호선의 북쪽 고촌 마을 앞에 펼쳐진 소규모의 평탄지 일대에 해당한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철마면 고촌리 155-2번지 일원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고촌리고촌 마을에서 흘러온 소하천이 동쪽의 안평 마을에서 흘러온 안평천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곡부가 형성되었다. 고촌리 유적은 2002년 10월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를 하여 4개소에 유적이 있는 것을 파악하고, 2004년 12월부터 2005년 5월까지 시굴 조사를 하여 다양한 시대의 유구(遺構)[옛 토목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확인되면서 2005~2007년과 2008년에 경남문화재연구원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 구 1기, 돌덧널무덤[石棺墓] 1기, 삼한~삼국 시대 대·소형의 나무 기둥 구멍[木柱列] 6열과 공방지(工房址) 2기, 구덩이[竪穴] 3기, 소성 유구 18기, 삼국 시대 고상 건물 터 58동, 구덩이 19기, 원지 1기, 우물 4기, 도로 1기, 통일 신라 시대 건물 터 2기, 축대 2기, 담장 1기, 기와 가마 2기, 기와 무지 1기, 우물 5기, 고려 시대 삼 가마 2기, 기와 가마 4기, 구덩이 22기, 수혈 건물 터 1기, 조선 시대 숯가마[炭窯] 2기, 소성 유구 1기, 삼 가마 4기, 지상식 건물 터 3기 등 청동기~조선 시대에 해당하는 다종다양한 성격의 생활 및 생산 유구가 조사되었다. 각 시대의 유구에서 석기·토기·목기·칠기·기와 등의 인공 유물과 동식물 유체 등 엄청나게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삼한 시대 유구는 해발 고도 99.8m의 구릉 남쪽 기슭인 국도 14호선 북편에 집중한다. 이곳은 고촌 마을에서 내려오는 소하천과 안평천이 합류하는 곳으로 곡간부를 이루고 저습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저습지는 삼한 시대 및 삼국 시대 문화층으로 이루어졌다. 하층인 삼한 시대 문화층에서는 삼한 시대 후기의 작업지, 대·소형의 나무 기둥 구멍 6열, 공방지 2기, 구덩이 2기, 소성 유구 18기, 혼패토각층 등이 조사되었고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작업지는 곡간부 중앙의 해발 고도 57~57.8m 선상에 동서 5~10m, 남북 30m의 범위로 기반층 상부 자연 요철 면에 할석(割石)과 마사 성분의 사질 점토를 깔아 조성하였다. 작업지 상면에서 미완성 목기류와 다양한 곡각 기류들이 집중 출토되었다. 작업지의 중앙부에 목재 더미가 가지런한 상태로 노출되었는데, 길이는 150~270㎝, 직경 10㎝ 정도이며 40여 점이었다. 이 목재들은 건축 부재나 나무 기둥으로 사용하기 위해 준비한 것으로 추정된다.

골각기는 다량의 녹각제 도자 병을 비롯해 뼈화살촉(骨鏃)·뼈바늘(骨針)·각골·복골(卜骨) 등도 다량 출토되었다. 동물 유체는 사슴과 멧돼지의 두개골이 많이 확인되었는데, 두개골에서 절개흔과 해체흔이 많은 빈도를 보이는데, 이는 사슴과 멧돼지의 뇌수를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목기는 두레박·안 부속구·절구·안·방망이·쌍날따비·고무래·팽이·다공형 목기·농공구 병부·불명 목기 등 농공구와 생활 용기의 목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목태흑적 칠고배·목태흑칠첨저완(木胎黑漆尖底碗) 등의 칠기가 출토되었다. 칠고배는 적색과 흑색의 칠을 입혀 장식하였는데, 현재까지 출토된 칠기 중 가장 뛰어난 제품으로 추정된다. 이 외에도 화로 모양 토기·연질옹(軟質甕)·짧은 목 항아리[短頸壺]·두 귀 항아리[兩耳附壺]·완(碗)·시루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소성 유구는 평면 형태가 타원형에 가깝고, 지면을 얕게 판 뒤 불을 피워 소결된 바닥과 수개의 소결층(小缺層)이 형성되었다. 대부분의 소성 유구 내부에서 대형의 연질옹이 출토되었고, 연질옹의 표면에 그을음이 묻어 있는 예가 많다. 이 소성 유구는 규모가 작아 연질 대옹을 소성하기는 불가능한 구조이므로 연질옹을 소성한 유구는 아니다. 그을음이 묻어 있는 연질옹이 나온 점을 볼 때, 연질옹을 이용해 생산 활동에 종사한 사람들의 식사를 위한 야외 노지 또는 칠기를 만들기 위한 칠을 끓인 노지일 가능성도 있다.

대·소형의 나무 기둥 구멍은 구릉 말단부와 곡간부 저습지의 변환 지점에 해당하는 해발 고도 57.5~57.8m 선상에 위치한다. 대형 나무 기둥을 180~200㎝ 등 간격으로 설치한 후 아래위로 2열의 횡목을 걸쳤고, 횡목을 고정하기 위해 횡목의 안쪽과 바깥쪽에 소형 나무 기둥을 박아 넣은 구조이다. 나무 기둥 구멍은 곡간부의 침식과 저지대의 유수가 역류하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과 동시에 생활 공간을 구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시대 문화층에는 소성 유구, 대·소형 나무 기둥 유구, 공방지, 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대형 나무 기둥 유구는 직경 20㎝가량의 원형 목재를 약 150㎝ 등 간격으로 저습지 서쪽 경계부터 동쪽 경계 지점까지 구릉부를 감싸듯이 설치되었다. 대형 나무 기둥 유구 남서쪽에 같은 진행 방향으로 소형 나무 기둥 구멍이 배치되었다. 이곳에 나무 기둥 구멍을 설치한 이유는 안평천의 범람으로부터 생활 공간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화층에서도 다양한 성격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건축 부재·대형 나무 기둥·걸이용 갈고리·쌍날따비·고무래·절구·절구공이·안 부속구·손잡이 장방형 용기·용기·뚜껑·칠기 화살통·빗 등의 목기류와 칠기류가 출토되었다. 토기로는 입 큰 작은 단지[廣口小壺]·통 모양 그릇 받침[筒形器臺]·뚜껑·굽다리 접시[高杯]·연질옹·왜계 토기(倭系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골각기와 동식물 유체가 다량 출토되었다.

삼국 시대의 고상 건물 터는 고촌 마을 아래쪽과 해발 고도 99.8m의 구릉 남쪽 비탈면에 집중한다. 건물 터는 단칸, 정면 2칸×측면 2칸, 정면 3칸×측면 2칸 구조 등 다양하다. 출토 유물이 없어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5~6세기로 추정된다. 고촌 마을 아래쪽의 고상 건물지군과 저습지 사이의 곡간부에는 동래에서 기장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고, 도로 남쪽의 저습지 가까이에는 석축으로 만든 원지가 위치한다. 도로 길이는 총연장 300m 이상이며, 노폭은 2.2~6m이고, 노면은 10㎝ 내외의 할석을 깔아 포장하였고, 폭 170㎝의 차륜 폭이 확인되었다.

노면에서 많은 수량의 토기 및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는데, 토기의 특징으로 볼 때 도로는 6세기 후반에 설치되어 7세기 후반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지는 부산 지역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원지의 평면 형태는 동서로 긴 옥각형에 가깝고 동쪽으로 갈수록 넓어진다. 원지는 통일 직전의 삼국 시대에 처음 만들었고, 통일 이후에 한 번의 개축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 사용되었다. 규모는 동서 25.84m, 남북 9.7m, 총연장 55.33m이고 평면적은 251㎡이다.

통일 신라 시대의 유구도 삼국 시대의 도로가 있는 일대에 집중한다. 우물은 모두 6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석조이고, 평면 형태가 원형이다. 우물은 깊이가 200㎝ 이상인 것과 100㎝ 이하로 얕은 것이 있다. 깊이가 깊은 우물은 바닥에 자갈을 깔아 정수 시설을 설치하였고, 1호 우물은 주위에 원형으로 석축을 쌓았다. 이 석축은 우물을 긷거나 주위에서 작업을 하기 위한 작업 공간으로 추정된다.

[현황]

고촌리 유적 중 조사된 구역은 다세대 주택이 건설되어 사라졌고 고분군만 잔존한다. 출토 유물은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고촌리 유적은 청동기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일상생활과 관련된 다양한 성격의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삼한·삼국 시대의 마을 구조와 생활 모습, 그리고 생활 공간과 생산 공간의 구조, 저습지의 활용 같은 자연 지형의 개발과 활용, 자연 환경 등 다양한 부문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특히 삼한~삼국 시대의 저습지 유적의 확인 및 저습지를 어떻게 개발하고 활용하였는지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많은 정보들이 확보되어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자연 환경을 효율적으로 개발하였는지를 보여 주었다.

삼국 시대의 유구로는 구상 유구·자갈이 부석된 도로, 수십 동의 굴립주 건물(掘立柱建物) 터, 연속된 부정형 수혈, 원지 등이 확인되었다. 굴립주 건물의 경우 4주식·6주식·9주식 등 다양하지만, 원상태로 잔존된 목제 기둥의 확인은 향후 굴립주 건물의 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도로 유구의 확인은 삼국 시대 부산의 도로 구조 연구는 물론 동래에서 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망에 대한 연구와 더불어 삼국 시대의 지방 촌락 구조 연구에 일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리고 3세기 후반, 5세기 후반, 6~7세기의 다양한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구상 유구에서 초현기의 연유 도기가 출토되었는데, 왕경 이외 지역의 생활 유구에서 처음 출토된 것이다. 이는 신라에서 연유 도기가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지방의 중요지역에 보급하였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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