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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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宴享大廳- |
영어음역 | Yeonhyang Daecheong |
영어의미역 | Yeonhyang Main Floored Hal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74[대청동 4가 9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흥숙 |
[정의]
조선 후기 왜관에 온 일본 사절에게 연향을 베풀던 연회장 터.
[개설]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국교 재개를 위해 일본 사절이 계속 부산으로 오자, 급히 절영도에 왜관(倭館)을 조성하였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절영도 왜관이 불편하고 시설이 좋지 않다는 일본 사절의 불만이 제기되었다. 조선 측도 일본 사절을 계속 절영도에 두는 것은 섬에 유폐시키는 듯해 보이므로 외국 사절에게 미안한 일이라 판단하고, 새로운 왜관 조성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로써 두모포 왜관이 조성되는데, 그 완공 시기는 1607년 하반기였다.
『선조실록(宣祖實錄)』 1607년(선조 40) 6월 20일 기사에는 두모포 왜관 신축과 관련하여 경상도 순찰사(巡察使) 정사호(鄭賜湖)가 올린 장계가 수록되어 있다. 이 장계에 “새로 짓는 왜관에 들어서는 방옥(房屋)은 이미 다 완료되었고, 연향하는 대청(大廳)은 지금 기둥을 세우고 있다”라고 되어 있어 두모포 왜관이 신축되는 것과 동시에 연향 대청 건물이 세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향 대청에서는 일본 사절에게 베푸는 여러 연향이 베풀어졌다. 일본 사절은 매년 의례적으로 오는 연례 송사(年例送使)와 특별한 임무를 띠고 오는 별차왜(別差倭)[통칭 차왜(差倭)]로 구분된다. 연례 송사에게 베푸는 연향만 1년에 50~60회에 이르고, 별차왜에 베푸는 것까지 합치면 1년에 70~80여 회에 이르는 연향이 연향 대청에서 치러졌다.
연향은 하선 다례(下船茶禮)·하선연(下船宴)·별연(別宴)·노차연(路次宴)·명일연(名日宴)·진상 간품 다례(進上看品茶禮)·예단 입급 다례(禮單入給茶禮)·상선연(上船宴)·별하정(別下程)·예하정(例下程) 등 다양하게 있었는데, 연례 송사와 별차왜의 유형에 따라 연향의 수와 종류가 달랐다.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는 각종 연향에서의 절차, 연향 내용을 기록한 연향의(宴享儀)가 소개되어 있다. 그 내용은 “의식은 다례(茶禮)와 같이 꽃을 꽂고 풍악을 울리며 기생들이 춤을 춘다[구례(舊例)에는 소동(小童)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나 1612년(광해군 4) 차왜가 기생들의 춤을 고집한 까닭에 동래 부사 성진선(成晋善)이 계문(啓聞)하여 처음 시행하였다].
찬은 칠미(七味)로 하고 술을 아홉 차례 순배한 뒤 각자 교의(交椅) 앞에 평배좌(平排坐)한다[상선연 때는 평배좌가 없다]. 찻상을 올리고 통인(通引)이 동래 부사에게 술을 올리면 동래 부사가 마시고 정관(正官)에게 보낸다. 또한 정관에게 술을 올리면 정관이 마시고 동래 부사에게 보내어 서로 잔을 돌려가며 마신다[동래 부사는 두 번 돌리고 정관은 한 번 돌려 모두 석 잔을 마신다].
도선주(都船主) 역시 이와 같이 하고 압물(押物), 시봉(侍奉)이 차례로 행한다[각자 잔을 들고 마실 뿐이다]. 이와 같이 두 번 돌고 부산 첨사도 또한 이와 같이 한 후에 왜사(倭使)가 동래 부사와 부산 첨사 및 훈도, 별차의 앞으로 각각 상찬(箱饌)을 올린다[대차왜(大差倭)의 경우 접위관 앞에도 역시 올린다]. 술 마시기를 수차례 행한 후 동래 부사가 은근한 뜻으로 다시 한 잔을 권하고 난 후 파한다[구례에는 연향이 끝난 후에 주객(主客)이 각자 의자 앞에 서서 두 잔을 마시는데 이를 가리켜 중배례(重杯禮)라 한다. 다만 정관 및 선주에게만 행하고 압물 이하는 같이할 수 없었다].
1609년(광해군 1) 이후에 점차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따로 찬품(饌品)을 내어 술을 마시는데 한정이 없었다. 1613년(광해군 5) 동래 부사 이창정(李昌庭)이 왜사 접대의 예절을 옛날의 예처럼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장계를 올려 요청하자 조정에서 사목(事目)을 반포하여 왜인을 타일러 준행하도록 하니 왜인들이 처음에는 심히 떠들썩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마침내 명에 따르게 되니 비록 옛 의식과 모두 같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고쳐졌다]. 반종(伴從) 등은 [평배좌 때는 연향청의 기둥 안으로 들어온다] 무릎을 꿇고 남쪽에 앉으며 그들에게는 술과 찬을 주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연향은 상선연인가 하선연인가에 따라, 일본 사절의 지위 고하에 따라 음식을 놓는 방식, 내놓는 음식, 술 마시는 방식 등이 달랐다. 연향에는 일본 사절의 요청에 따라 조선의 기생들이 참여하여 춤과 기악을 제공하였다. 또한 조선에 특별한 사정이 생기면 연향을 베풀지 않고 의례만 행하고 음식물만 지급하기도 하였다. 1622년(광해군 14)에는 연향에 입고 나오는 복색(服色)에 대한 규칙을 만들어 양국 사이에 서로 싫어하는 일이 없이 접대에 임하도록 하는 규정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연향 대청 규모는 초량 왜관 때의 것을 알 수 있는데, 『변례 집요(邊例集要)』에는 32칸, 『통문관지(通文館志)』에는 32칸, 『증정교린지』에는 35칸이라 하고, 일본 자료인 『초량 화집(草梁話集)』에는 24×33칸이라 기록되어 있다. 부산 지역 화가인 변박(卞璞)이 1783년 그린 「왜관도(倭館圖)」를 보면 연향 대청 본 건물 주변으로 담장이 둘러쳐져 있고 담장에는 두 개의 문이 있다.
또한 말을 두는 마방(馬房), 창고 등을 갖춘 큰 건물이며 연향 대청 바로 옆에는 조선 군인의 초소인 동2 복병막(東二伏兵幕)이 있다. 일본 사절이 연향을 받기 위해 왜관에서 나가려면 왜관 북쪽 담장에 있는 외북문(外北門)과 내북문(內北門)을 통과하여 연향 대청으로 갔다. 외북문과 내북문은 연향이 있을 때만 열렸고, 외북문은 조선 군인인 동복병장(東伏兵將)이 지켰으며 내북문은 왜관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금도왜(禁徒倭) 2명이 지키고 있었다.
[변천]
연향 대청은 1607년 하반기 즈음 두모포 왜관 안에 처음 세워졌다. 두모포 왜관은 중앙에 연향 대청이 있고 동서로 동관(東館)과 서관(西館)이 세워졌다. 일본 사절이 묵는 곳은 서관이었는데, 일본 사절들이 서관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연향이 있을 때 동관에 있다가 연향 대청으로 갔다. 일본 사절은 서관의 칸수가 많지 않아 좁고 창문과 벽이 없어 숙박하기에 불편하다면서 서관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연향 대청을 옮기고 서관을 그곳에 세우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1611년(광해군 3) 6월 연향 대청을 왜관 밖, 동관의 동쪽으로 옮기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7월에는 연향 준비를 하는 공수가(公須家)를 수리하고, 1654년(효종 5) 부산진이 주도하여 연향 대청과 공수청(公須廳) 30여 칸을 중창(重創)하였다.
두모포 왜관에서 71년 동안 존속하다가 1678년(숙종 4) 왜관이 이전되자 함께 옮겨갔다. 1678년 신축 이후 1710년(숙종 36), 1738년(영조 14) 각 진(鎭)의 군졸을 모아 연향 대청을 수리하였고, 1787년(정조 11) 8월 역관 김건서(金建瑞)가 전(錢) 1,400여 냥을 조성하여 대청을 개축하였다.
1876년 근대 개항 이후 일본 사절과의 외교 의례 및 연향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881년 일본인이 그렸다는 「포산항 견취도(浦山港見取圖)」에는 구내청(舊內廳)이라 표기되어 있고 건물이 그려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연향 대청의 건물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산감리서 서기(書記) 민건호(閔建鎬)가 쓴 『해은 일록(海隱日錄)』 1886년 3월 29일 일기에는 조계 밖 서쪽에 있는 연대청이 무너져 그 터를 측량하기 위해 동래부의 담당 관리가 둘러보았고, 연대청 건물이 양국 사이에서 많은 역할을 한 중요한 건물이므로 일본영사관에도 연락하여 영사관 직원과 일본인 농부도 함께 그 터를 둘러보았으며, 5년에 한정하여 일본인이 파종하고 경작하며 세금을 내도록 하는 조약을 맺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연향 대청은 1886년 3월 전에 완전히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일본인 농부가 그 터를 농경지로 하고자 하였고, 이것이 일본영사관과 동래부에 전달된 듯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로써 연향 대청 터는 농경지로 이용되다가, 일본공립소학교(日本公立小學校)가 들어섰고, 이후에도 학교 부지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
두모포 왜관 때 있던 연향 대청은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 없고, 초량 왜관 때는 동래부에서 남쪽으로 약 12㎞[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금의 부산광역시 중구 중구로 74에 있는 광일초등학교 부지에 연향 대청이 있었다.
[현황]
현재 연향 대청은 없어졌고 그 자리에 광일초등학교가 들어서 있다. 광일초등학교 정문 안쪽에 연향 대청이 이곳에 있었음을 알리는 표지석이 2002년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