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60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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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의미역 | Pit Dwelling-style Stone-lined Tomb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홍보식 |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견되는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조성된 묘제.
[개설]
돌을 사용하여 주검을 안치한 매장 시설인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시기를 달리하여 전 세계의 각지에서 조영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 화북 지역, 특히 랴오닝[遼寧] 및 압록강 중·하류 고구려 적석총의 매장 주체 시설,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 백제 지역의 매장 주체 시설, 영남과 영동 등 신라·가야 지역의 매장 주체 시설로 조영되었다.
[변천]
가야·신라의 무대였던 영남 지역에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먼저 조영된 곳은 김해·부산의 낙동강 하류 지역으로 시기는 4세기 후반이다. 가장 빠른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축조된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 고분군(華明洞古墳群)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괴석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2~3단을 쌓아 네 벽을 축조하고, 각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하였다. 석곽 깊이는 100㎝ 내외이고, 나무 뚜껑을 덮었다. 이 시기의 수혈식 석곽은 곽을 돌로 만든 점 이외의 요소는 목곽과 거의 같은 점으로 볼 때,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기존 목곽묘의 요소에 목곽을 석곽으로 대체한 것이다.
5세기 초에 들어오면 낙동강 동안 지역 대형 묘의 매장 주체 시설로 수혈식 석곽이 수용되었는데, 대표적 예가 동래 복천동 고분군 93호와 22호 묘이다. 동래 복천동 고분군 93호 묘는 4세기 말 중·소형 구덩식 돌덧널무덤을 계승하여 나무 뚜껑을 사용하였지만, 벽체를 정교하게 구축하였다.
뒤이은 22호 묘는 묘광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석곽 벽과 묘광 사이의 충전 공간이 넓으며, 그 부분에 돌과 흙을 채워 벽면을 보강하였고, 완전 지하에 석곽이 위치한 점 등은 목곽묘의 요소와 상통하지만 석재를 가공하고 정연하게 쌓은 후 4매의 거대한 돌을 뚜껑으로 덮은 점은 새로운 요소이다. 석곽은 길이가 5m 이하로 짧다. 동래 복천동 고분군 22호 묘를 시작으로 하여 부산 지역의 대형 묘의 묘제가 수혈식 석곽으로 바뀌고 뒤이어 가야의 대형 묘의 묘제도 수혈식 석곽을 채용하면서 가야의 보편적인 묘제가 된다.
5세기 후반이 되면, 석곽 안쪽에 격벽(隔壁)을 만들어 주곽과 부곽을 구분하게 되면서 석곽의 길이가 길어지고 너비가 좁아져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을 띠고, 뚜껑돌의 수가 7~8매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를 잘 나타내는 것이 연산동 고분군이다. 연산동 고분군은 구덩식 돌덧널무덤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고분군으로, 길고 좁은 세장방형에 10매 내외의 뚜껑돌이 덮여 있다. 이런 큰 규모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6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진 이후 급격하게 쇠퇴한다.
[평가와 의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부산 지역에서 4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까지 보편적인 묘제로서 조영되었으나, 6세기 전반에 이르러 횡구식 석실이 새로운 묘제로 등장하여 중·소형 묘의 매장 주체 시설로 조영되면서 점차 사라졌다. 구덩식 돌덧널무덤은 돌의 채취와 운반, 석재 가공과 가공된 석재를 무너지지 않게 쌓아 올리는 기술 등이 요구되며, 이러한 기술의 축적은 토목·건축 공학적인 발전을 가져와 삼국 시대 말경에 많이 축조되는 석성 축성의 기술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