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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921
한자 粉靑沙器
영어의미역 Grayish-blue-powdered Celad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교육/문화·예술,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경자

[정의]

부산 지역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개설]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고려 시대 말인 14세기 중엽경의 상감청자(象嵌靑瓷)에서 양식적으로 분화하여 조선 시대 전기인 16세기 전반까지 약 200여 년 동안 제작된 자기(磁器)의 한 종류이다.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회청색의 태토 위에 흰색의 백토로 분장을 하는 과정에서 발달한 상감(象嵌), 인화(印花), 박지(剝地), 조화·음각(彫花·陰刻), 철화(鐵畵), 덤벙, 귀얄 기법 등 다양한 장식 기법에 주목하여 1930년대에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이 ‘분장 회청 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명명하고, 이를 줄여서 ‘분청사기’라고 지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분청사기가 제작되고 사용된 조선 전기에는 백자(白磁)와 마찬가지로 사기(砂器, 沙器) 또는 자기(磁器)로 불리었다.

[변천]

분청사기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 전기인 태종~세종 연간에 공납제(貢納制) 체제 안에서 현물(現物)의 세금인 공물(貢物)의 한 종류로 제작된 점이다. 당시에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공적인 용도의 그릇 중 자기[사기]는 지방 관부(地方官府)가 주관하여, 전국에 있는 139개소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제작해 중앙의 여러 관사(官司)에 납공(納貢)하였다. 이러한 공납용(貢納用) 분청사기는 수공업품의 제작에 관한 업무를 관장한 공조(工曹)에서 각 도(道)에 내려보낸 견양(見樣)에 의거하여 동일한 형태와 문양으로 제작되었다.

기종에는 대접과 접시가 많으며, 그릇 전체를 빼곡하게 장식한 인화문(印花紋) 및 제작 지역의 이름인 지명(地名), 장인의 이름[匠名], 그리고 그릇의 사용처인 중앙 관청의 이름[官司名] 등 여러 가지 명문(銘文)이 표기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분청사기의 양식(樣式)은 15세기 중엽경부터 본격화된 백자의 위상 변화에 따라 영향을 받았다. 즉 대부분 금은기(金銀器)였던 왕실용[內用] 및 국용(國用)의 그릇이 백자로 대체된 1440년대부터 여러 지역에서 공납용 백자를 제작하였으며, 1450년대부터는 백자에 대한 수요가 더욱 증가하고 청화백자(靑畵白磁)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백자의 위상 변화는 분청사기의 장식 기법이 인화 기법에서 귀얄[풀과 같은 식물의 줄기로 만들어 백토를 바를 때 사용하는 붓] 또는 덤벙 기법으로 바뀌어 그릇의 표면이 마치 백자처럼 보이는 양식으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공적인 용도로 사용할 백자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공납을 통한 백자의 수급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한성부(漢城府)와 가까운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司饔院)에 속한 사기소(沙器所)인 관요(官窯)를 설치하여 왕실용 및 국용 백자의 제작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중앙 정부 차원의 백자 제작은 분청사기가 소멸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남산동 자기 가마터 분청사기]

남산동 자기 가마터에서 수습된 분청사기는 대접 및 접시에 흑백 상감 기법의 연당초문(蓮唐草文)이 있고 기면 전체가 인화 기법으로 빼곡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이러한 양식적 특징은 1400~1450년에 제작된 공납용 분청사기와 일치한다. 이 시기에 공납용 자기를 제작한 가마들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자기소로 기재되었는데, 당시 경상도 경주부에 속한 동래현(東萊縣)에는 자기소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동래구수안동 유적(壽安洞遺蹟)에서 ‘동래 인수부(東萊仁壽府)’가 표기된 인화문 분청사기가 출토된 예가 있기 때문에, 남산동 자기 가마터 이외에 당시 동래현의 영역 안에 공납용 분청사기를 제작한 가마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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