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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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現代-密貿易 |
영어의미역 | Smuggling of the Contemporary Times |
이칭/별칭 | 현대의 밀수,해방 이후의 불법 무역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용득 |
[정의]
해방 이후 부산항을 중심으로 한 밀무역의 흐름.
[변천]
밀수란 것은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울 때,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성행을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해방과 암울한 6·25 전쟁 중에 밀수품으로 치장한 가장 사치스러운 ‘마카오 신사’가 부산의 남포동과 광복동을 활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를 거쳐 정부가 수립되면서 관 주도(官主導)의 통제 무역이 시작되었다. 그러다보니 민간 무역이 활성화 될 수가 없었고 생필품마저도 귀하였다. 그래서 중국 정크(junk)선에 의한 밀수를 시작으로 마카오와 홍콩으로 오가는 화물선에 의한 밀수가 성행하였다.
더군다나 대일 무역은 일본 정부에서는 변칙 무역(變則貿易)이라 불러가면서 밀무역에 동조를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대마도 특공대 밀수(對馬島特攻隊密輸)’는 1950년 중반부터 1960년 말에 꼬리를 내릴 때까지 약 15년간 부산항을 중심으로 남해안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마도 이즈하라[嚴原] 항을 거점으로 한 이 특공대 밀수 조직은 10톤 남짓한 소형 선박에 고속 엔진을 탑재하고서 약 30노트의 속력으로 야간 질주를 하였는데, 폭력배와 권력 기관원까지 개입된 매우 악명 높은 밀수 조직이었다.
부산항의 아치섬[朝島]은 당시의 이들 밀수꾼의 소굴로 유명했으며, 국제 시장은 밀수품이 전시·거래되는 대표적인 시장으로 활기가 넘쳐나 마치 밀수품 박람회장과 같았다. 1966년도 대마도 이즈하라세관에 신고 된 밀수선은 160척, 신고 금액은 32만 8388달러이었으나, 1967년도는 더욱 증가해서 190척, 신고 금액은 69만 568달러이었다.
특공대 밀수가 서서히 사라지고 1970년대에 고개를 든 것은 대일 냉동 운반선과 무역선에 의한 선원 밀수였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나갈 때 수산물을 싣고 나간 수출선이 들어올 때는 밀수선으로 둔갑을 할 정도로 선원 밀수가 극심하였다. 1975년 12월, 여수 밀수 사건이 도화선이 된 부산 밀수 사건은 개항 이후 최대의 밀수 사건으로, 부산항을 무대로 활개를 치던 밀수 폭력 조직 등이 대거 검거되었다.
또한 1981년 중반에 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한·일 간을 오가는 페리호 및 항공편을 이용한 여행자에 의한 사치성 물품의 휴대 반입과 밀반입이 급증을 이루게 된다. 1990년 이후에는 중국과의 교역 확대로 참깨나 고추와 같은 저가의 농산물 또는 가방류나 의류 등의 가짜 상품이 컨테이너에 담겨져 밀반입되기도 하고, 최근에는 국제 우편물을 이용하여 가짜 상품이나 마약류가 밀반입 되는 추세이다.
[현황]
부산항은 우리나라의 최대 항만으로서 밀수의 총본산이라 불리었는데, 그 대부분이 일본을 통한 밀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중국과의 밀무역이 1/3을 차지할 정도로 높은 수위를 점하고 있다. 2010년도 부산세관의 밀무역 동향을 보면 644건, 8127억 원을 점하였는데, 이중 관세를 탈세한 직접 밀수는 약 13%에 불과하다. 외환관리법에 의한 불법 외환 거래가 50%를 넘고 있으며, 가짜 상품 등을 비롯한 지식 재산권도 20%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밀무역을 처벌하는 관계 법령이 다양하다보니 ‘밀수’라기보다는 ‘불법 무역’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