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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5404
한자 堂山祭
영어의미역 A Village Ritual at the Dangsan Shrine
이칭/별칭 동제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집필자 김승찬

[정의]

부산 지역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당산제는 마을 주민의 안과태평과 산물의 풍요를 기원하기 위하여 당산신에게 일정한 시간과 절차를 통하여 제사를 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이를 지역에 따라 ‘동제’라고도 한다. 당산제는 대체로 정초나 1월 14일 밤 자정 무렵에 올리는 것이 통례인데, 보통 마을과 관련이 있는 당산에서 마을 주민 전체를 위해서 거행된다. 따라서 지역이나 마을에 따라 진행 방식이나 형태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지만 당산제의 목적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에 큰 차이는 없다. 또한 당산제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하는 큰 행사였으나 지금은 일부 마을에서 관습대로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제관의 자격과 선출 방법]

제관은 마을 회의에서 부정이 없고 제의일과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맞으며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선정한다. 부정이란 제관 선정 당시를 기준으로 1년 이내에 가족 중 임신하거나 출산한 사람이 있는 경우, 가족 중 병자나 사망자가 있는 경우, 사람의 시신(屍身)을 보거나 만진 경우, 가축 또는 짐승을 죽이거나 죽은 짐승을 본 경우, 과거 1년 안에 재난을 당한 경우 등이 부정에 해당된다. 이러한 부정이 있는 자를 피하고 주로 부부가 모두 생존한 이를 제관으로 선출한다.

제관의 선출 방법은 선정제, 윤번제, 고정제, 신탁제(神託制) 등이 있는데 마을에 따라 그중 한 가지 방법을 채용하고 있다. 선정제란 제관을 선정하는 날을 기준하여 그 이전 한 달 내지 한 해 동안에 부정이 없고 제의일과 생기복덕이 맞는 자를 마을 회의에서 선정하거나, 마을에 있는 반(班)을 순번을 정하여 그 반에서 제관을 선정하는 방법이다. 윤번제란 몇 마을이 어울려 한 당산신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 마을 순번을 정하여 돌아가면서 제의를 주관하는 방법이다.

고정제란 마을 사람들이 금기의 까다로움 때문에 당산제 모시기를 기피하는 마을에서는 이장(里長)이 제관이 되거나 승려나 무당을 불러 모시는 방법인데, 승려나 무당은 대체로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신탁제란 무당이나 마을 사람이 서낭대를 잡고 당산에 가서 주과포를 진설하고 삼배한 후 그 해에 당산제를 모실 집을 선정해 달라고 비손하면 서낭대에 당산신이 내려 당산제를 모실 집을 가리켜 준다. 그러면 그 집에서 당산제를 모시게 되는 방법이다. 부산 지방의 경우 옛날에는 선정제가 위주였으나 현재는 고정제의 방법을 많이 채용하고 있으며, 신탁제를 행하는 마을로는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 대리 마을 정도이다.

[제의일]

각 마을에서 거행하는 당산제의 날짜는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마을의 고정된 당산제일에 부정한 일이 발생하면 따로 길일을 잡아 지내거나 그해에는 당산제를 올리지 않는다. 부산 지역에서 현재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 287개 마을 중 약 70%가 음력 1월 14일 자정 무렵과 15일에 제의를 지낸다.

기장군의 경우는 당산제를 지내는 92개 마을 가운데 85개 마을이 음력 1월 14일 자정에 당산제를 지내며, 7개 마을이 1월 15일 아침에 지낸다. 강서구의 경우는 당산제를 지내는 54개 마을 가운데 12개 마을이 1월 2일에, 25개 마을이 1월 14일에, 6개 마을이 1월 15일에, 11개 마을이 섣달그믐에 당산제를 지낸다. 이 현상으로 볼 때 부산의 동부 지방은 정월 보름을 중시하는 신앙생활을, 서부 지방은 정월 보름과 연말연시를 중시하는 신앙생활을 영위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산제를 1년에 한 번 지내는 마을이 256개 마을이며, 나머지 마을은 1년에 2, 3번 이상 지낸다.

[제의 절차 및 금기 생활]

제의 절차는 마을마다 차이가 있으나 옛날에는 대동소이하게 ‘산신제·당산제·거릿대장군제’ 또는 ‘산신제·당산제·샘제[용왕제]·거릿대장군제’ 등의 절차였으나, 요사이는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간소화의 원인은 첫째, 농어촌의 도시화로 인해 거주 문화의 변동 현상을 들 수 있다. 상수도의 보급이 샘제[용왕제]를, 도로의 개설이 마을 진입로를 허물어 거릿대장군제를 없애는 원인이 되었다.

둘째, 민간 신앙에서 신격의 뒤섞임 현상 및 부부신(夫婦神) 관념의 발생을 들 수 있다. 옛날에는 산신[남신]과 당산신[여신]을 엄연히 구별하여 산신제는 제당 밖에서, 당산제는 제당 안에서 제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산신과 당산신의 변별력 약화와 부부신 관념의 형성으로 당산신과 산신의 합사 현상과 당산신의 부부신 형성의 경향을 나타내게 되어 근래에는 축약·간소화하였다.

셋째, 당산제에 따르는 금기 사항을 들 수 있다. 마을에 소년 죽음이 잇따라 일어나거나 재화(災禍)가 발생하였을 경우 제관이 당산제를 잘못 지냈다거나 금기를 어겼다는 지탄을 받게 되니, 서로 제관이 되기를 꺼려 이제는 주로 이장이 제관이 되거나 절에 당산제를 맡겨 약식화, 불교 의례화의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당산제는 마을의 안녕과 풍양을 위해 지내는 제의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금기를 중시한다. 제관과 그 부인은 제의 전 3일부터 제의를 마칠 때까지 철저하게 금기 생활에 든다. 부정을 타기 쉬우므로 제관 집에는 성과 속을 경계 짓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남과의 만남을 금하고, 부정한 데[출산·혼사·초상]의 출입을 하지 않으며, 부부간의 잠자리도 피한다. 제관이 제물을 구입하러 갈 때는 삿갓을 쓰고 가되, 가는 도중에 누구를 만나든 인사를 하지 않으며, 제물을 구입할 때도 상인과의 대화를 꺼려 흥정하지 않고 제물 값을 부르는 대로 지불한다.

구입한 제물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도 도중에 쉬지 않고 바로 온다. 제의 2, 3일 전에 제장(祭場)과 제물 조리 용수(用水)의 샘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사방에 놓아 부정을 막는다. 따라서 당산제의 제물을 조리할 샘물은 금줄을 치고부터 당산제가 끝날 때까지는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긷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제관 집과 제당 및 제물 만들 용수처를 세속에서 분리시켜 성역화(聖域化)한다.

제물을 조리할 때는 제관의 부인이 입을 흰 천이나 종이로 막고 조리하며, 간도 보지 않는다. 제의날 밤에는 제관이 찬물에 목욕재계하고 정갈한 옷을 갈아입은 뒤 부인과 함께 제물을 가지고 제당에 가서 위패 앞에 제관의 집에서 제물을 차리는 예식(禮式)대로 제물을 진설하고 유가식(儒家式) 제의를 올린다. 제의에 축관이 있을 경우 축문을 읽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제관 혼자서 비손하고 당산신과 마을의 가가호호를 위해 소지(燒紙)를 하고 제의를 끝낸다.

제의날 밤에는 마을 사람들도 소란스러운 언행을 삼가며, 개도 짖지 못하게 창고 같은 데에 가두어 둔다. 그러니 제의는 정적(靜寂) 속에서 엄숙하게 치러지는 것이다. 제의 뒤에는 금줄은 걷지만 부정한 데의 출입 금지 등 금기 생활은 3개월이나 6개월 내지는 일 년간 지킨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마을이 이와 같은 금기 사항을 지키지 않는다. 제관도 제의 뒤 짧게는 3일간, 길게는 정월 한 달간 부정을 피하고 몸조심을 한다. 이런 점으로 인하여 제관 되는 것도 꺼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제관을 하지 않으려 하니, 자연히 이장이 제관이 되거나 사찰[절]에 부탁하여 당산제를 거행하는 마을이 늘어만 가는 실정이다.

[부대 행사]

제의 뒤에는 마을 사람들이 제관의 집이나 마을 회관에서 제의에 쓴 제물을 나누어 음복한다. 종교학에서는 이를 회향(會饗) 또는 성찬(聖餐)이라 한다. 이 회향 관습은 본래 종교적 의례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서 성화(聖化)된 제물에 들어 있는 성스러운 특성을 회향에 참여한 자가 획득함으로써 그 성스러운 힘과 서로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또 성스러운 특성을 나누어 지님으로써 동질적 유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데 있다.

당산제를 마친 뒤 행하는 음복 과정도 당산제의 한 과정이기 때문에, 부정이 없고 음복 뒤에도 며칠간 부정한 데를 가지 않을 사람만이 참여한다. 이 때문에 옛날에는 부정이 없고 금기를 지킬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음복에 참여하여 당산신이 흠향한 제물을 나누어 먹었다. 이로써 성스러운 특성을 음복한 사람들이 나누어 가짐과 아울러, 마을의 모든 가정이 한 당산신의 가호(加護) 아래 일 년 동안 안녕과 풍요를 보장받게 된다는 유대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당산신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음복을 통해 보다 깊은 친밀감과 유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은 위와 같은 당산제 때 음복 과정의 순기능을 잊고 마을 노인들끼리 모여 먹는 것으로만 여겨 주로 경로당에서 제물을 먹게 되니 자연히 노인층만이 음복에 참여하게 된다.

당산제 뒤의 음복 과정에서 가지는 마을 회의도 단지 당산제의 결산 보고가 아니라, 지난해에 마을에서 세운 공동 사업의 성과가 어떠한지를 점검하고, 당년(當年)의 마을 공동 사업에 대해서 토의하고 계획을 세워 실천할 것을 다짐하는 동시에 마을의 공동 관심사에 대한 제반 사항과 마을 기금의 운용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는 장(場)인 것이다. 그런데 요사이는 마을 청년회가 관장하는 당산제를 제외하고는 마을 회의를 갖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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