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52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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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龍岫里佳洞遺蹟 |
영어의미역 | The Ga-dong Sit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 9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영민 |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리에 있는 삼국 시대의 마을 유적.
[개설]
용수리 가동 유적(龍岫里佳洞遺蹟)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은 128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화로형 토기[노형 토기(爐形土器)] 조각으로 3세기 것이다. 최근 조사된 인근의 용수리 가동 고분군에서 원삼국 시대의 무덤이 조사된 바 있으므로 보다 이른 시기의 유구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3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부가 구연 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 조각이 가장 늦은 시기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용수리 가동 유적의 주거지는 이르게 보면 3세기 중엽부터로 볼 수 있지만, 같은 시기의 다른 유물이 빈약한 점을 감안한다면 4세기부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후 주거지의 마지막 시기는 부가 구연 장경호를 근거로 6세기로 추정하고 있다.
[위치]
용수리 가동 유적은 현재 정관 신도시 내 전원 주택지로 개발된 곳에 위치한다. 이미 주택 단지로 조성되면서 유적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유적이 조사된 곳은 정관읍사무소에서 북쪽에 조성된 주택 단지이다.
[형태]
용수리 가동 유적은 부산광역시와 대한주택공사가 공동으로 추진한 정관 신도시 조성 사업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2003년 5월부터 2005년 9월까지 울산대학교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삼국 시대의 마을 유적 전체를 조사하였다.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다양한 자료들은 자연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당시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주거지와 굴립주 건물 터, 저습지에서 수습 식물 유존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대략 4세기경에 이곳에는 논농사가 시작되었다. 재배한 곡물은 벼를 비롯하여 밀, 기장 등이 있으며 그 외 복숭아, 박, 참외 등도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밀은 주거지 내부 아궁이 옆에서 많은 양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시 밀이 중요한 먹을거리였음을 의미한다.
삼국 시대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抹角方形)이었다. 이는 사각형[방형(方形)]의 모서리 부분에 각을 죽인 형태인데, 주거지 바닥에 남아 있는 기둥 구멍의 배치와 벽체의 흔적에서 이와 같은 형태가 남아 있다. 즉 직각 모서리의 사각형이 아닌 모서리에 각을 죽인 8각의 형태이다. 출입 시설과 관련된 흔적은 주거지의 평면 조사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의 연구 성과를 참고한다면 입구에서 사다리를 통하여 내부로 출입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기존에 알려진 집 모양 토기[가형 토기(家形土器)]에 당시의 주거 형태가 잘 묘사되어 있는데, 여기에 묘사된 출입 시설은 굴립주 건물(掘立柱建物)을 제외한 경우에는 사다리를 이용한 출입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용수리 가동 유적의 주거지 출입 시설도 가형 토기에 묘사된 양상과 유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사된 대부분의 주거지에는 취사를 위한 아궁이와 난방과 연기를 밖으로 배출(排煙)하기 위한 고래[아궁이에서 지펴진 열기와 연기가 굴뚝으로 전달되도록 만든 중간 통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아궁이는 중앙부에 솥 받침돌을 세워 취사용 토기를 고정하였다. 많은 수의 주거지에서 기다란 알 모양의 토기[장란옹(長卵甕)]와 시루 조각들이 아궁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아궁이와 고래는 볏짚을 잘라 넣은 진흙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비교적 규모가 큰 유구는 바닥에 기둥 구멍들이 확인되는데, 주거지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중심 기둥 구멍 4개와 벽체를 따라 5~7개의 벽체 기둥 구멍들이 벽면을 따라 배치되었다. 벽을 지지하는 기둥 안쪽으로 진흙으로 만든 벽체를 덧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유구에서는 벽기둥의 진흙 벽체가 맞물린 형태로 확인되기도 하였다.
굴립주 건물(掘立柱建物) 터는 전형적인 형태인 9개의 기둥 구멍을 갖춘 것에서부터 다양한 형태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굴립주 건물 터 가운데 일부에서는 당시에 사용된 나무 기둥이 기둥 구멍에 그대로 남은 상태로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하여 당시 기둥 재료로 사용된 나무의 종류가 확인되었는데, 주로 밤나무와 굴피나무 등이었다. 이것들은 당시 주변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나무로 파악되었다. 한편 굴립주 건물 터는 삼국 시대의 주거 공간과 분리된 별개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점은 당시 주거 공간과 저장 공간이 별도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을 공동의 저장 공간이 운영되었다는 점은 소유 관계에서 어느 정도 상호간에 규율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시 마을을 관통하여 흘렀던 하천에서는 생활 용기를 비롯하여 자연 유물과 인공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수습된 목제 유물은 당시 실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유물들로서 가마니를 짜기 위한 도구로 추정되는 목제품과 목제 신발,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목제 유물들이 저습지에서 발굴되었다. 이것들은 향후 삼국 시대 목제 유물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현황]
용수리 가동 유적은 정관 신도시 개발 공사가 실시되어 지금은 모두 매몰되었다. 현재 전원 주택지로 개발되었지만 현 지표에서 2m 아래에는 조사된 유구의 흔적이 흙으로 덮여 있다. 기장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용수리 가동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마을 전체를 전면적으로 발굴 조사하였다는 점에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이를 통하여 단위 취락의 사회 구조라든지 공간 활용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료를 확보하였다는 점은 학술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비교 자료가 늘어난다면 상호 비교가 가능한 기초 자료로 활용될 것이다. 또한 최근 삼국 시대 주거지의 모습이 잘 남겨진 양호한 유구들이 다량으로 조사되어 고건축의 연구에도 획기적인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는 용수리 가동 유적이 단순히 고고학 자료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고건축을 비롯한 옛 환경 등 다양한 연구 분야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인근에서 용수리 가동 고분군도 조사되면서 용수리 가동 유적은 삶과 죽음의 유적이 함께 완전하게 조사된 부산 기장 지역의 대표적인 유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