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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368
한자 仇法津
영어의미역 Gubeop-ji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한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나루터
관련문헌 『동래부지(東萊府誌)』|『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10년 - 구법곡 기찰 설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715년 - 구법곡 기찰 중창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일대

[정의]

부산광역시 남구 덕천동에 있던 조선 후기 나루터.

[명칭 유래]

조선 시대 금곡 동원진 나루터에서 교역을 하기 위해 왜인(倭人)들이 드나들 때 밀무역과 잠상(潛商)들을 단속하기 위해 수검소(搜檢所)인 기찰(譏察)을 구법곡(仇法谷)에 설치하였다.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남구 덕천동 기찰 마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형성 및 변천]

부산은 대일 무역의 중심 창구로서 국내외 상품 유통이 활발하였다. 특히 무임(武任)이나 역관(譯官)을 낀 동래 상인들이 주도한 대마도 상인과의 잠상 활동(潛商活動), 즉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이에 1710년(숙종 36) 동래부에서는 왜관 밖에 수문(守門)과 설문(設門)을 두어 잠상들의 물화를 단속하는 동시에 왜인들의 출입을 제한하였다. 또 동래부 외곽의 십휴정(什休亭)[현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과 구법곡에 수검소를 설치하여 상인들의 물화를 단속하였다. 구법곡에 설치한 수검소는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동 구포 왜성[일명 의성(義城)] 아래의 기찰 마을에 설치하였다. 기찰의 찰방(察訪)이 오늘날 경찰과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덕천(德川)의 하구 지역인 연둥개는 1900년대 초 경부선 철로가 놓이기 전까지만 해도 기찰이 있던 구법진(仇法津)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고려 시대에는 부산광역시 북구 만덕동 하리까지 배가 오르내렸다고 한다. 옛날의 뱃길이 토사(土砂)의 퇴적으로 밀려나고 현재는 육로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官廨)에 “구법곡 기찰은 4간이며 동래부에서 서쪽으로 20리의 양산군(梁山郡)에 있다[仇法谷 譏察 四間 在府西二十里 梁山地]”라고 기록되어 있고,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권3 관우(館宇)에 “수검소 하나는 동래부의 서쪽으로 20리 떨어진 구법곡에 있고, 하나는 북쪽으로 10리 떨어진 십휴정에 있는데, 동래부가 장교를 정하여 기찰하도록 하였다[搜檢所 一 在府西距二十里仇法谷 一 在府北距十里什休亭 本府定將校譏察]”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구법진은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을 기점으로 낙동강을 통해 이루어진 대일 민간 무역의 현황을 짐작할 수 있는 지명으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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