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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학훈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4016
한자 倭學訓導
영어의미역 Government Instructor in Charge of Japanese Student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상규 2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관

[정의]

조선 후기 동래 왜관과의 통역 및 왜학 생도의 일본어 교육을 담당한 관인.

[제정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이후 일본 사자(使者)의 상경(上京)이 불허되었고, 왜관 범주에서 양국 간의 외교·무역이 이루어졌다. 그 때문에 조선 정부는 사역원에 속하여 일본어의 통역과 교육을 맡아 보던 왜학훈도(倭學訓導)를 동래부에 파견하였다. 17세기 이후 동래부와 왜관 간의 의사를 중개하고, 양국 간의 사안을 교섭한 왜학훈도의 업무 범위는 임진왜란 이전보다 훨씬 컸다고 할 수 있다.

[담당 직무]

왜관에 설치된 군현에서 근무한 왜학훈도는 사역원의 교회(敎誨)인 사람으로 선발되고 임기는 30개월이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동래부에 파견되는 왜학훈도는 사역원에서 일본어에 능숙한 역관으로 파견되었다. 1623년(인조 1)부터 신설된 왜학 별차 1명은 훈도의 업무를 보조하면서 왜학 역관으로서 경험을 쌓는 자리이었다. 사역원의 일본어 전공 역관으로서 중요한 직책을 수행한 자리가 동래부의 왜학훈도 외에 왜관 차비 역관, 왜관 감동 역관, 통신사행의 당상 역관, 대마도로 파견되는 문위 역관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업무의 경중에 관계없이 상근직 근무자는 왜학훈도이었다. 조일(朝日) 관계의 흐름이나 사역원의 역관 운용 구조를 고려해야겠으나, 다른 근무처는 대략 10개월에서 2~3개월 동안에 사명을 수행하는 자리이었다.

왜학훈도의 임무 가운데 소통사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내용은 소상하지 못하다. 역관인 만큼 왜학훈도가 동래부와 왜관 간의 의사를 중개하는 것에 일차적 책임이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 양국 간 미묘한 사안을 주선·조정하거나 현안을 교섭하도록 하는 책임도 강조되었다. 실상 왜학훈도는 17세기 이후 동래 부사의 지휘를 받으면서 왜관을 상대하는 실무적인 책임자이었다.

[변천]

동래부의 왜학훈도라는 직책이 사역원의 왜학 역관 내에서 어떠한 위치이었는지 분간할 필요성이 있다. 훈도를 지내고 다시 동래부의 차비 역관·감동 역관으로 몇 개월씩 근무하는 자리로 임명될 수도 있었고, 문위행·통신사의 역관으로 선발될 수도 있었다. 형식은 달랐지만, 실상 같은 왜학 역관 중에서도 외국어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많은 일부 사람이 한정된 자리에 중복적으로 임명되었다. 조일 간 무역의 이득이 상당히 감소한 시기에는 중인 자제들이 일본어 전공을 기피하여 결과적으로 역량 있는 왜학 역관이 나오지 않았다는 지적에서 알 수 있듯이 왜학훈도 직책 또한 부침이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일본 쪽 문서에서 동래부의 왜학훈도는 왜학 별차와 함께 양역(兩譯)으로 묘사되어 왜관 운영에 관계되는 모든 영역에서 조선 정부의 결정 사실을 전달하는 매개자로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문서의 대종은 책임 소재가 동래 부사의 선에서 종결되었기 때문에, 동래 부사의 차원이 아닌 역관 이하에서 벌어졌던 양국 관계의 사실이 밝혀지기 위해서는 일본 측 문서도 적극적으로 찾을 필요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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