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4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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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仇法谷譏察 |
영어의미역 | Gichal Village in Gubeobgok Valle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 323-5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화진 |
[정의]
조선 후기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에 있던 동래부에서 타지로 나가는 길목의 검문소.
[개설]
조선 시대 부산의 동래부에서 타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래에서 양산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부산 지역은 옛날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으로, 특히 1407년(태종 7) 부산포 왜관 설치 이후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기 때문에 이 두 길목에 대한 검문이 불가피하게 되어 설치된 것이 기찰(譏察)[검문소]이었다.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것이 구법곡 기찰(仇法谷譏察)이었고, 동래에서 양산으로 가는 길에 설치된 것이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이었다.
구법곡(仇法谷)은 의성산 동쪽 골짜기로 기찰이 설치된 곳은 지금의 덕성초등학교 일대이며, 이곳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기찰 마을이 형성되었다. 구법곡의 기찰 마을은 현재 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 302~314 번지 일대에 있던 자연 마을로 덕천천이 흘러 내려와 의성산 옛 성터 뒤쪽으로 이어지는 부근에 있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시대 금곡 동원진 수참에서 일본 국왕 사절과 교역꾼들이 정식 절차를 밟아 서울로 가기 위해 낙동강을 오르내릴 때 강 하구 지역에서 왜인과 밀무역을 하는 잠상들이 날뛰어 이를 단속하기 위해 의성산 동쪽 구법곡 어귀에 기찰을 설치하면서 기찰 마을이 생겨났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두모포 왜관을 비롯하여 초량 왜관이 설치되면서 왜관을 찾아오는 왜인의 수가 증가함과 더불어 왜인과 동래부 지방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밀수품을 단속하고 잠상을 엄금하기 위하여 검문소 기능을 하는 기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1740년(영조 16)에 편찬된 『동래부지(東萊府誌)』에 1715년(숙종 41) 기찰의 중창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전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기찰은 본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염탐하거나 특정한 곳에서 검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일에 종사하는 관원을 기찰 군관(譏察軍官) 또는 기찰 포교(譏察捕校)라고 하였다. 이들 기찰 포교가 상주하여 기찰을 행하는 곳을 기찰방(譏察坊)이라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냥 기찰이라고 일컬었다.
[관련 기록]
『동래부지』 제16 관해조(官廨條)에 “구법곡 기찰은 네 칸이며 동래부에서 서쪽으로 20리 정도 되는 양산 땅에 있다. 숙종 을미년에 부사 권수(權燧)에 의해 중창되었다[仇法谷譏察 四間 在府西二十里梁山地 肅宗乙未 府使權燧重創]”라고 기록되어 있다.
[변천]
구법곡 기찰이 있던 일대는 현재 주거 밀집 지역으로 변모하였고, 남해 고속 국도 진입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덕성초등학교와 덕천중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위쪽에는 낙동고등학교가 들어서 옛날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구법곡 기찰은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한일 외교 관계 및 국방·교통 체제, 나아가 국경 지역의 대비 체제 등에 대해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