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1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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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十休亭譏察 |
영어의미역 | Siphyujeong Gichal |
이칭/별칭 | 부곡동,기찰(譏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지명/고지명 |
지역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박화진 |
[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에 설치된 조선 시대의 검문소.
[개설]
기찰(譏察)[검문소]은 본래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수소문하고 염탐하거나 특정한 곳에서 검문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며, 이 일에 종사하는 관원을 기찰 군관(譏察軍官) 또는 기찰 포교(譏察捕校)라고 하였다. 이들 기찰 포교가 상주하여 기찰을 행하는 곳을 기찰방(譏察坊)이라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그냥 기찰이라고 일컬었다.
1680년(숙종 6) 십휴정 기찰(十休亭譏察)이 이전한 지역은 일찍이 조선 시대에 십휴정 역원(十休亭驛院)[현 부산광역시 금정구 남산동 팔송리 일대]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람이나 물품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다. 따라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운송되는 물품이나 사람들을 검문하는 곳이 십휴정 기찰이었다. 이곳 마을을 십휴정 기찰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십휴정 기찰 마을 또는 생략하여 기찰 마을[현 금정구 부곡동]이라 불렀는데, ‘기찰’은 부곡동의 다른 지명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대한제국 때에는 부곡리에서 분리되어 북면 기찰리로 되었다. 1904년(고종 41) 탁지부 사세국에서 편찬한 『경상남도 동래군 가호안』에 경상남도 동래군 북면 관내에 기찰동이라는 동명이 보인다. 당시 기찰동의 호수는 8호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약 35호 정도가 살았고, 옛 국도변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아랫기찰과 웃기찰로 구분되어 불렸다고 한다.
[변천]
조선 시대에 동래부(東萊府) 부산에서 타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구포에서 낙동강을 건너 김해로 나가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동래에서 양산으로 나가는 길이었다. 부산 지역은 예전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하던 곳으로서 특히 1407년(태종7) 부산포 왜관(釜山浦倭館) 설치 이후 왜인들의 왕래가 빈번하였으므로, 이 두 길목에 대한 검문이 불가피하게 되어 기찰을 설치하였다. 2개의 기찰 중 후자의 동래에서 양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설치된 것이 십휴정 기찰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일본의 요청으로 두모포 왜관(豆毛浦倭館)을 비롯하여 초량 왜관(草梁倭館)이 설치되면서 왜관을 찾아오는 왜인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더불어 왜인과 동래부 지방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밀수품을 단속하고 잠상을 엄금하기 위하여 검문소 역할을 하는 기찰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1680년 동래 부사 조세환(趙世煥)이 양산군 성 밖에 있었던 규모 6칸의 기찰을 동래부 북쪽 3.93㎞[10리] 지역으로 이전시키고, 지역의 지명을 따서 십휴정 기찰이라 불렀다.
『동래부지(東萊府誌)』 제16 관해조(第十六 官廨條)[1740년]를 보면 “십휴정 기찰은 6칸이며, 옛날에는 양산군 성 밖에 있었다. 1680년 숙종 경신년에 부사 조세환에 의해 동래부 북쪽 10리 지역에 이전하여 다시 건립하였다[十休亭譏察 六間 舊在梁山郡城外 肅宗庚申 府使趙世煥 移建在府北十里]”라는 기록이 나온다.
[의의와 평가]
십휴정 기찰은 조선 시대 부산 지역의 한일 외교 관계 및 국방·교통 체제, 나아가 국경 지역의 대비 체제 등에 대해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