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9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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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泰振 |
영어음역 | Yang Taejin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131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성현 |
[정의]
부산 출신의 기업인으로 국제그룹 창업자.
[가계]
1901년 부산에서 아버지 양재석(梁齋錫)과 어머니 송보순(宋父順)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11세 때인 1911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함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다. 김덕년과 결혼 후 동래에서 쌀가게를 운영하며 재산을 모아 거대 기업인으로 성장하였다.
[활동 사항]
양태진(梁泰振)은 일찍이 서당에서 수학하였으며, 동래공립보통학교(東萊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 일본인 동업자 4~5명과 함께 공동으로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644번지에 만류일흥업주식회사(滿留一興業株式會社)라는 상호의 정미소를 개업하였다. 이 무렵 양태진은 10여만엔 가량의 재산을 축적한 자산가로 성장하였으며, 해방 후인 1947년에는 조선목재주식회사(朝鮮木材株式會社) 이사로 취임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의 맏아들 양정모(梁正模)는 1937년 부산공업고등학교(釜山工業高等學校)를 졸업하고 식량영단 경남지부에 근무하였는데, 해방 이후 물자 사재기와 환전을 통해 재산을 축적하였다. 식량영단을 퇴직한 양정모는 부산공업고등학교 1년 후배인 6촌 동생 양형모(梁炯模)와 함께 1948년 1월 아버지 양태진이 운영하는 정미소 부지 3,834.71㎡[1,160평] 중 495.87㎡[150평]를 분할 받아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국제상사주식회사의 출발이었다.
공장에는 14인치 롤러와 캘린더 각 1대, 중고 보일러 1대, 가유부(加硫釜) 1대가 설치되어 하루에 고무신 600족을 생산할 수 있었다. 공원은 50여 명 정도였으며 일제 강점기부터 고무 배합 기사로 경험을 쌓은 강수언(姜守彦)이 생산을 책임졌다. 국제고무공업사는 헌 고무신을 재생한 고무를 원료로 사용하여 질이 좋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판매는 순조로워서 1년 결산 결과 몇십만 원의 이익금이 발생하였다.
사업 전망이 보이자 1949년 2월 양태진 또한 사업에 참여하여 자본금 1,000만 원의 국제화학주식회사(國際化學株式會社)로 재발족하였다. 여기에는 양태진 부자 외에도 양태진의 동생 양태수(梁泰壽), 양태진의 친구 전진원(錢進源), 양정모의 친구 구봉출(具鳳出), 양태진의 맏사위 이재우(李在雨), 국제신발 특약점 주인 강대영(姜大榮) 등이 참여하였다.
주식회사로 재발족한 이후 양태진은 사장에 취임하여 경영을 지휘하였다. 그는 국내 제일의 고무 배합 기술자인 박명진(朴明鎭)을 파격적인 대우로 초빙하여 생산을 맡겼으며, 국제화학주식회사에서 생산하는 ‘왕자표’ 신발은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아 나갔다. 자신감을 얻은 양태진은 1950년 1월 자본금을 2,000만 원으로 증자하여 생산 기반을 확충하였다. 그 결과 하루 6,000족의 신발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으며, 종업원의 수도 500여 명에 달하였다.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해 8월 국제화학주식회사는 육군 군수 공장으로 지정되었다. 이는 국제화학주식회사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화학주식회사는 근대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한편 1951년 자본금을 1억 원으로 확충하고 일일 생산량을 6만 족으로 확대하였다. 이로서 국제화학주식회사는 전국 5대 제화 메이커로 성장하였다.
전쟁이 끝나가던 1953년 4월 국제화학주식회사는 자본금을 다시 500만 환[구화 5억 원 상당]으로 확충한 뒤 사업 다각화에 착수하였다. 이를 위해 신발 제조에 필요한 일부 자재를 직접 생산하는 한편, 1954년 6월에는 제1호 자회사인 동남물산주식회사(東南物産株式會社)를 설립하여 고무 등의 원자재 수입을 맡겼다.
그러나 국제화학주식회사가 급속하게 성장하는 와중에 양태진은 몇 차례 불미스런 사건에 연루되었다. 1953년 10월 4일에는 남산동 신민 호텔에 머물던 중 97만 환을 절도당했다가 회수하였는데, 이 사건 수사는 부산 시민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59년 7월 2일에는 부산의 건민 고무 공장 사장 배영수 등이 국제화학주식회사가 ICA 원조 자금으로 고무 원료를 매점하여 업계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고 부흥부에 탄원한 데 앙심을 품고 아들 양태진을 포함한 수명의 자회사 종업원과 함께 배영수를 집단 폭행하여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3일에는 국제고무공업사 공장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100여 명의 사상자[사망 52명]가 발생하는 참사가 일어났으며, 이후 배상 문제로 유족들과 충돌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국제화학주식회사는 성장을 거듭하여 수출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1962년 9월에 농구화 2,424족을 미국으로 수출한 것을 시작으로 신발 수출을 꾸준히 늘려나갔다. 1963년 7월에는 자본금 2,500만 원으로 진양화학(進洋化學)을 설립하고 부암동에 2만 1034.71㎡[6,363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공장을 마련, 해외로 수출할 비닐 제품과 신발을 제작하였다. 신발과 비닐 제품의 수출이 꾸준히 증가한 덕분에 진양화학은 1967년 자본금이 4억 2500만 원에 달하여 국제화학주식회사에 맞먹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양태진은 1968년 1월, 68세 때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당시 48세의 맏아들 양정모에게 국제화학주식회사 사장직을 물려주었다. 이밖에 양태진은 대한고무공업협회 이사장, 『국제 신보』 이사, 대한인권옹호지도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76년 11월 14일 하오 1시 서울특별시 종로구 제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수출 면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자 1965년 11월 30일 제2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