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544 |
---|---|
한자 | 梁正模 |
영어음역 | Yang Jungmo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동래구 충렬대로309번길 17-6[안락동 1030]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대래 |
[정의]
부산 출신의 대표적인 향토 기업인.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1921년 9월 13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양태진(粱泰振)은 동래구 안락동에서 출생한 부산 토박이로, 동래공립보통학교[현 낙민초등학교]를 중퇴하고 행상을 하여 모은 돈으로 쌀가게를 열어, 1938년에 큰 정미소를 설립할 정도로 돈을 모았다. 그리고 일본인과 같이 설립하였던 이 정미소를 해방 직후 불하받았고, 훗날 국제화학을 창업하였다. 양정모(梁正模)의 부인은 김명자(金明子)이고, 슬하에 큰아들 양희재(粱熙宰)와 딸 여덟 명을 두었다.
[활동 사항]
양정모는 동래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3년 부산공립공업학교[현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고, 1937년 졸업을 한 뒤 정미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일을 돕다가 식량영단 경상남도지부에서 일하면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후 그는 장사를 시작하며 아버지의 정미소와 조선목재의 일을 도왔다. 독자적인 사업을 생각하고 있던 양정모는 공업 학교 출신답게 제조업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신발 공장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 무렵 아버지 양태진의 범일동 정미소에 큰 불이 나자 1948년 4월에 양정모는 그 터의 한구석에 공장을 지었는데, 그것이 훗날의 국제고무공업사였다.
초기 국제화학의 왕자표 신발은 70여 개 신발 기업들이 경쟁하던 부산에서 하루 600켤레에 불과한 생산량에 불량품도 많아 고전했지만, 부산진 시장을 중심으로 조금씩 판로를 넓혀 갔다. 1949년 12월 국제고무공업사는 국제화학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꾼 뒤, 6·25 전쟁기의 특수(特需)를 누리면서 크게 성장하였다. 1953년과 1960년 두 번의 큰 화재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양정모는 대폭 증자(增資)의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하였다.
1962년에는 진양화학을 설립하여, 1963년 3월 이복동생인 양규모에게 분리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1968년 잠시 진양화학의 사장을 역임하였지만, 곧 국제화학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국제화학은 1969년 22만 8099.17㎡[6만 9000평]에 이르는 대규모 사상 공장을 신축하여, 1972년 전국 신발 생산량의 20%를 생산하고, 1979년 수출 5억 달러를 기록하는 급성장세를 보였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양정모는 1971년 성창섬유를 설립하고, 1972년 동아금속을 인수하여 국제상선을 설립하였으며, 신발수출조합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74년 양정모는 보국증권과 삼양펄프를 인수하고 동해투자금융을 설립하였다. 1976년 풍국화학과 조광무역을, 1977년 2월 연합철강과 그 계열사인 연합물산과 연합개발 및 연합통운을 인수하였다. 1976년 국제상사로 이름을 바꾸고 1977년 창업 30주년을 맞았는데, 이때 왕자표 신발은 명실공히 업계의 왕자 자리에 올랐고, 국제상사는 단일 신발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였다.
이후 양정모는 사업 수완을 발휘하여 동서증권, 동우산업, 원풍산업, 국제종합건설, 국제종합기계, 국제종합기술개발 등을 편입시켜 21개 계열사, 3만 8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재계 서열 7위의 막강한 기업 집단을 이루면서 1980년 국제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럼에도 국제상사는 주력 기업 대부분의 본사를 부산에 둔 전형적인 향토 재벌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양정모는 9대[1976년 6월 19일], 10대[1979년 5월 21일], 11대[1982년]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을 연임하며, 1976~1985년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과 1981~1985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을 지냈다. 재임 중 부산도시가스(주)와 항도투자금융(주)을 설립하는 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5년 2월 13일 국제그룹은 갑작스레 채권 은행단의 자금 관리에 들어갔다가, 21일 전격 해체되었다. 당시 정부는 국제그룹 해체의 원인이 자체 브랜드 개발에 실패하고, 용산 신축 사업으로 인한 자금난, 전근대적인 기업 경영 형태, 사우디아라비아에서의 건설업 적자 등 부실에 있다고 발표했지만,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기업 길들이기에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었다. 이후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연합철강은 동국제강그룹에, 국제상사 등 나머지 계열사와 사옥은 한일그룹으로 넘어갔다.
그룹 총수에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양정모는 와신상담 끝에 1987년 국제그룹복원본부를 발족시켜 국제그룹 되찾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7년여의 지리한 싸움 끝에 양정모는 1993년 7월 헌법재판소로부터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끌어냈다. 하지만 1996년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패소하여 한일그룹을 상대로 기업을 돌려받는 데 실패하였다.
한일그룹으로 넘어갔던 국제상사는 1998년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가 2006년 LS그룹의 계열사인 (주)E1을 새 주인으로 맞아 (주)LS네트웍스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이로써 국제상사의 회사명은 59년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1970~1980년대 중반 한국 신발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토박이 기업가 양정모는 비운의 경영인이라는 한을 남긴 채 2009년 3월 29일 향년 88세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