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7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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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神社參拜反對運動 |
영어의미역 | Anti-Shinto Shrine Worship Movement |
이칭/별칭 | 신사 불참배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상규 1 |
[정의]
일제 강점기 부산 등에서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하고 일어난 기독교계의 반일 저항운동.
[개설]
한국 교회에 대한 일제의 박해는 다양했으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신사 참배 강요였다. 일제는 내선 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 정책(皇民化政策)의 일환으로 신사(神社, 神祠)에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했는데, 이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강요였으므로, 심각한 신교(信敎)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었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회와 감리교회가 굴복하였고, 끝까지 저항하던 장로교회도 탄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 참배를 결의함으로써 일제에 굴복하였다. 부산과 경상남도는 신사 참배 반대가 강하게 일어난 지역 중 하나이다.
[역사적 배경]
일제의 기독교 세력 탄압은 국권 강탈 당초부터 시도되었다. 기독교가 조선인 사회와 조선인의 민족 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많은 병원과 고아원, 구미(歐美)의 선교사들을 통한 국제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식민 통치에 있어서 기독교와 선교사들은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특히 만주 사변[1931] 이후 본격화되었는데, 대동아권(大東亞圈) 형성을 위한 국민정신 통일의 차원에서 신사에 대한 참배를 정책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도라는 일본 종교로 천황 중심주의의 이념적 통일을 꾀하려는 시도였고, 동시에 기독교를 분열·약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였다. 이는 부산 지역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경과]
신사 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 해 11월 14일 평안남도 지사는 공·사립 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하고 참석자 전원에게 평양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때 기독교계의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G. S. McCune], 숭의여중학교 교장 선우리[V. L. Lee] 등은 기독교 교리에 위배됨으로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후 “신사 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이라는 이름으로 각급 학교에 공문을 발송하고, 60일간의 유예 기한을 주고 참배를 거부할 경우 학교 폐쇄 조치를 취한다고 했다. 기독교 학교는 신사에 참배하고 학교를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신사 참배에 불응하고 학교 폐쇄를 감수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부산의 일신여학교도 이 문제로 고심하였으나 1940년 결국 폐쇄되었고, 후에는 구산학원으로 인계되어 오늘의 동래여자중학교·동래여자고등학교로 존속하고 있다.
1936년 8월 우가키[宇垣] 총독 후임으로 미나미[南次郞]가 취임하였는데, 이때부터 신사 참배는 더욱 강요되었다. 이제는 교회와 교회 기관 그리고 교회 지도자에게도 참배를 요구하였다. 중일 전쟁(中日戰爭) 발발 이후 애국일, 일본 국기 게양, 동방 요배,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정에 이어, ‘일면일신사’(一面一神社) 정책을 수립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웠다. 부산에는 용두산 공원을 비롯하여 부산부 중앙동과 동래부 구포 등 여러 곳에 신사(神祀)가 건립되었다.
교회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천주교, 감리교는 굴복하였고, 성결교는 끝까지 버티다가 1943년 12월 29일 교단이 해체되었다. 장로교는 신사 참배를 반대했으나 강요가 심해지자 점점 그 의지가 약화되어, 결국 “신사는 국가 의식이므로 참배를 허용한다.”고 결의하였다.
강력한 신사 참배 반대론자로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를 역임하기도 했던 경상남도 창원 출신의 주기철은 이미 구속당하였고, 친일 인사를 통해 교계 지도자들을 회유하는 등 일제는 교계를 분열시켰다. 이때 부산 지방에서는 한상동 목사를 비롯하여 강루식, 박인순 등이 강하게 저항하였고, 이들의 투쟁으로 인해 부산·경상남도 지역은 전국에서도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강하게 일어난 지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
[결과]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을 때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 보인 태도는 대략 다음의 3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신사 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죄로 간주하고 순교적 각오로 반대·투쟁하는 입장[반대론], 둘째는 일제의 탄압과 박해 때문에 마지못해 신사 참배를 인정하고 순응하는 입장[타협론], 셋째는 신사 참배는 국가 의식이라 하여 신앙 양심에 가책이 없이 신사 참배를 적극 옹호하고 수용하는 입장[수용론]이 그것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 노선뿐이다. 즉 신사 참배를 순교적 각오로 반대 투쟁한 입장과 신사 참배를 수용하고 타협하는 입장이다.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전국적으로 20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2,000여 명이 투옥되었고 그 중 30여 명은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역시 큰 고통을 당했는데, 주기철은 7년간 투옥되어 있던 중 1944년 4월 순교하였고, 부산의 한상동 목사는 해방 후 석방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신사 참배를 반대한 중요한 이유는 3가지였다. 첫째, 신사 참배는 하나님의 계명에 반하는 우상 숭배라는 점, 둘째, 개인의 신앙 양심과 신교의 자유를 억압·탄압하는 것이라는 점, 셋째,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은 신앙 정신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자 신교(信敎)의 자유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동시에 이것은 민족 독립 운동의 성격을 지닌다. 실제로 일제는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식민 정책에 반하는 민족주의 운동 혹은 민족 해방 운동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검거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으로 투옥되거나 순교했던 주남선, 주기철 목사 등이 독립 유공자로 인정되고 보훈이 추서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