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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88
한자 李德成家文籍
영어의미역 Ideoksseongga Conduct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대연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정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2008년 4월 2일연표보기 - 이덕성가 문적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이덕성가 문적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8년 6월 16일 - 이은창이 부산광역시에 기증
소장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63[대연동]지도보기
성격 고문헌
저자 이경석|이후영|이진원|이광려|이광사|이면백
권책 1책[『백헌공필』]|1책[『참판공필』]|1책[『시직공유고』]|1책[『시직공유묵』]|1책[『동종계첩』]|1책[『선집』]|4권 2책[『참봉공집』]|2책[『원교집』]|2책[『대연유고』]
문화재 지정번호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정의]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덕성 가문의 전적류.

[저자]

이덕성(李德成)은 조선 제2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8세손으로, 충청 감사를 역임하였다. 이덕성가 문적에 속한 고서 9종의 필사자와 저자들은 이덕성의 종조부, 아들, 손자로부터 삼종 현손까지 아주 가까운 혈족이며, 모두 이덕성의 증조부인 이유간(李惟侃)의 후손이다. 이들의 관직을 보면,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이후영(李後英) 참판, 이진원(李眞源) 세마시직(洗馬侍直), 이광려(李匡呂) 참봉까지 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했을 뿐 아니라 학문과 문장 및 글씨에 뛰어난 인재들이었다. 함풍군 이유간의 후손들은 관계에서 유명했을 뿐 아니라 문학·예술·사상·철학에서도 두드러져 명필(名筆)·명저(名著)와 타성들이 가학(家學)이라고 부르는 강화학파(江華學派)까지 형성하여 다른 파종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종파를 이루어냈다. 함풍군 이유간의 후손들은 사상적으로 소론파(少論派)이다.

일찍이 석문공 이경직(李景稷)의 증손 이진유(李眞儒)[1669~1730]가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노론(老論) 4대신[김창집·이건명·이이명·조태채]을 죽이라는 상소문의 소두(疏頭)가 되었기 때문에 영조가 집권하여 1730년(영조 6)에 장살(杖殺)되자, 아우 이진검(李眞儉)[1671~1727], 이진휴(李眞休)[1674~1707], 이진급(李眞伋)[1675~1747], 이진위(李眞偉)[1681~1770]도 일제히 벼슬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가 살아갈 터를 잡았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써, 세상에서 말하는 육진팔광(六眞八匡)을 배출하게 되었다.

육진(六眞)은 석문공 이경직 후손 중에서 이진순(李眞淳)[1678~1738], 이진수(李眞洙)[1684~1732], 이진유, 이진검, 이진급과 백헌공 이경석 후손 중에서 이진망(李眞望)[1672~1737]을 합쳐 말하며, 팔광(八匡)이란 석문공 이경직 후손에서 이광세(李匡世)[1679~1756], 이광보(李匡輔)[1687~1745], 이광려[1720~1783], 이광사(李匡師)[1705~1777], 이광찬(李匡贊)[1702~1766]과 백헌공 이경석 후손 중에서 이광덕(李匡德), 이광의(李匡誼)[1697~1746], 이광도(李匡度)[1717~1746]를 합쳐 칭한다. 이 육진팔광은 벼슬보다는 학문·예술로 더 유명하다. 원교(圓嶠) 이광사의 글씨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쌍벽이요, 그의 아들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부족분을 채워 주는 보서(寶書)이다.

북곡(北谷) 이진유의 막내아우 이진위의 아들 이광명(李匡明)[1701~1778]은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1649~1736]의 손서(孫婿)가 되어 양명학을 배워 계자 이충익(李忠翊)[1744~1816], 손자 이면백(李勉伯)[1767~1830], 증손 이시원(李是遠), 현손 이상학(李象學)[1829~1889], 5대손 이건창(李建昌)[1852~1898], 이건승(李建昇)[1858~1924], 이건방(李建芳)[1861~1939] 등에게로 이어지며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당의통략(黨議通略)』의 저자인 이건창은 여한십가(麗韓十家) 중의 한 사람인 대문장가이며 청백리로서 나라가 망하자 종제 이건방만을 남겨 놓고, 아우 이건승과 함께 조국 광복을 위하여 북간도로 떠났다.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실천한 것이다. 다만 종제 난곡(蘭谷) 이건방은 장차 강화학을 이어갈 담원(薝園) 정인보(鄭寅普)[1892~1950?]를 위해서 국내에 남아 강화학을 전승하였다.

이처럼 이덕성 가는 정치적으로는 소론으로서, 학문적으로는 양명학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조선 후기에는 강화학파를 형성하여 조선 중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조 사회에 정치적으로 학술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집안이다. 아울러 대대로 명필을 많이 배출하여 이광사의 필체는 ‘원교체’라 하여 추사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었다.

[형태/서지]

이덕성가 문적은 모두 9종 1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헌공필(白軒公筆)』은 1책의 필사본으로 명필적(名筆跡)이다. 필사자는 이경석[1595~1671]으로 반곡공(盤谷公) 이덕성의 종조부이다.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상보(尙輔), 호는 백헌(白軒)이다. 명재필사자(明齋筆四字), 백헌필(白軒筆)로 씌어 있는 것처럼 명재와 백헌 두 사람의 글씨를 호접장으로 제책한 필사본이다.

『참판공필(參判公筆)』은 1책의 필사본으로 명필적 유일본이다. 저자이자 필사자인 이후영[1613~1662]은 이경직의 차남이고 이덕성의 부친이다. 관직은 증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시직공유고(侍直公遺稿)』는 불분권(不分卷) 1책의 필사본이다. 『시직공유묵(侍直公遺墨)』[반천유고] 또한 불분권 1책의 필사본이다. 저자인 반천(盤泉) 이진원[1676~1709]은 이덕성의 장남으로 1699년(숙종 25)에 치러진 증광시에서 1등 제4인으로 입격하였다. 소과인 진사시는 3년에 1번 치러지는 시험으로 전국에서 1등 5명, 2등 25명, 3등 70명 등 총 100명을 선발한다. 이진원은 1등 제4인이므로 100명 가운데 4등이라는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종계첩(同宗稧帖)』은 1책의 필사본으로 명필적이다. 장정은 절첩장으로 표지를 제외하고 4장이다. 『선집(先集)』은 불분권 1책의 필사본이다. 『참봉공집(參奉公集)』은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두 책의 저자인 이광려[1720~1783]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재(聖載), 호는 월암(月巖)·칠탄(七灘)이다. 아버지는 이진수이며, 이덕성의 손자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시에 급제한 후 두 번이나 내려진 능참봉직도 마다하고 관로(官路)를 스스로 떠나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공은 학식과 덕행이 높았고 문장이 뛰어나 당시 ‘사림의 제1인자’였다고 한다.

그의 문장에 대해서 이만수(李晩秀)는 그의 문집에서 “국조(國朝) 300년의 문교를 받아 이광려 선생을 낳았다.”고 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인품이 훌륭하였고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인물이었기에 따르는 제자가 많았고 존경을 받았다. 그의 제자인 신대우(申大羽)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하던 당시의 시대 흐름 속에서 일찍부터 책을 통하여 고구마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였다.

1763년(영조 39)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온 조엄(趙湄)이 대마도로부터 고구마를 들여오자 책을 통하여 고구마 재배에 열성이었다고 『군방보(群芳譜)』에 기록되어 있다. 고구마 재배는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말았으나 그의 시도는 당시 동래 부사였던 강필리(姜必履)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어서 고구마 재배에 성공을 거두게 하였다. 이는 그의 학문이 실리에 바탕을 두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원교집(圓嶠集)』은 건곤 2책의 필사본이다. 저자인 이광사는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다.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수북(壽北)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를 지낸 이진검이다. 『대연유고(垈淵遺稿)』는 상하 2책의 필사본이다. 저자인 이면백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자는 백분(伯奮), 호는 대연(岱淵)이다. 아버지는 이충익이다. 1801년(순조 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힘써 학자로서 이름이 높았다.

[구성/내용]

『시직공유고』와 『시직공유묵』은 이진원이 남긴 글을 모은 문집으로 『시직공유고』에는 시(詩)가, 『시직공유묵』에는 문(文)이 수록되어 있다. 『시직공유묵』에는 「제이참판징명문(祭李參判徵明文)」을 비롯한 제문 13편, 편지 2편, 서문 2편 등 27편의 산문이 실려 있다.

『동종계첩』의 편차를 보면, 전주 이씨 덕천군파에서 종중계 모임을 구성하게 된 내력 등을 기술한 이원성(李元成)[1632~1714, 이후영의 아들]이 1679년에 쓴 「종회수계서(宗會修稧序)」가 있다. 이어서 계원 44명의 이름과 자(字), 생년월일, 생원 진사과 및 문과 합격 여부, 관직을 기재하였다. 『원교집』은 서문이나 발문 등이 없는 필사본 2책으로, 제1책[건]에는 동국악부(東國樂府)와 시(詩)가, 제2책[곤]에는 문(文)이 실려 있다.

『대연유고』는 서문과 발문이 없어 문집의 편찬 시기나 편찬 경위를 알 수 없다. 표제는 ‘대연유고(垈淵遺稿)’이나 권수제는 ‘폐추집(弊帚集)’이다. 필사기가 없어 필사자를 알 수 없음은 물론 권차로도 나뉘어 있지 않다. 다만 권두에 있는 목차에 ‘고금시(古今詩)’와 ‘문(文)’으로 나뉘어 있다. 제1책에 시, 제2책에 문으로 분철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시가 워낙 많은 때문인지, 제1책에서 목차를 제외한 본문 72장과 제2책의 15장까지가 시이고, 제2책의 16장부터 74장까지가 문이다.

[의의와 평가]

『백헌공필』은 조선조 소론의 대표적 인물인 이경석, 윤증(尹拯)의 친필인 것만으로도 가치가 높다. 『참판공필』은 필사자인 이후영의 글씨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를 볼 때 아주 명필이다. 필사자는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의 종증조부인데, 글씨로 보아 이광사의 글씨가 그가 개발한 독창적인 서체가 아니라 이 집안에 내려오는 필체임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따라서 이광사의 필적만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경석의 『백헌공필』이나 이후영의 『참판공필』 등도 원교체의 근원을 가늠할 수 있는 진귀한 유일의 원본 자료로서 서지학적으로뿐만 아니라 한국 고미술사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시직공유고』와 『시직공유묵』은 목판이나 활자로 간행되지 않은 필사본으로서 전사본(傳寫本)도 발견되지 않는 유일본으로 파악되므로 서지학적으로도 귀중한 자료이다. 아울러 이 책에 게재된 시문들을 연구하면 이진원의 문학적 우수성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국문학의 지평을 확대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동종계첩』은 전래가 흔하지 않은 유명 문중의 계첩으로서 사회학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선집』은 현존하는 유일의 필사본으로 목판으로 간행된 『참봉공집』에 실리지 않은 시가 다수 실려 있으므로 이광려의 시 세계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봉공집』은 목판본으로 필사본 『선집』에는 실려 있지 않은 문(文)이 실려 있다. 따라서 『참봉공집』과 『선집』 모두 국문학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 귀중한 자료이다. 『원교집』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이광사의 시문이 담긴 문집으로서 이광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존하는 이광사의 문집은 8권 4책, 10권 4책 등 권차가 이 책과 동일하지 않아 유일한 필사본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서지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하겠다.

『대연유고』는 국사편찬위원회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국사편찬위원회에는 1책만 소장되어 있고,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2책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본은 권1에는 시, 권2에는 문으로 권차가 나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해제를 볼 때 내용의 편차는 동일한 것으로 파악되므로 『대연유고』의 전사본으로 보인다.

이은창 소장 『대연유고』는 이면백의 자필고본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저자의 집안에 전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자필고본이거나 후손이 이면백의 원고를 모아 편차하고 정서한 고본이다. 이 책은 인본이 없는 필사본으로서 서지학적으로나 국문학적으로 매우 가치가 큰 것으로 파악된다. 현재 국내에는 전사본이 1종밖에 전하지 않는 귀중한 책이다. 이덕성가 문적은 2008년 4월 2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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