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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토지야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52
한자 張吐之野
영어의미역 Jangtojiya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한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관련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비정 지역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

[정의]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 일대를 가리키는 삼국 시대 이름.

[개설]

장토지야(張吐之野)는 삼국 시대 군영(軍營)의 놀이 문화 중 하나인 마상(馬上) 기예(技藝)뿐 아니라 신라의 주변 소국에 대한 정복 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는 고지명(古地名)이다.

[명칭 유래]

『삼국사기(三國史記)』 거도 열전(居道列傳)에 나오는 장토지야라는 지명은 여타 다른 고문헌에서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명칭 유래를 밝히기 어려운 실정이다.

[형성 및 변천]

신라 초기에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주변 소국인 우시산국(于尸山國)[현 울주군 웅촌면]과 거칠산국(居柒山國)[현 부산광역시 동래구]을 병합할 생각을 하면서,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지야에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 말을 타면서 기예를 부리는 놀이를 하였다. 그러면 매번 두 소국의 사람들이 구경을 왔다. 이후 신라는 두 소국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곳에서 병마(兵馬)를 출동시켰지만 두 소국의 사람들은 매년 열리는 마상 기예 놀이인 것으로 알고 별다른 군사적 대응을 하지 않아 결국 신라에 병합되었다.

장토지야는 남북의 동래·울산 방면뿐 아니라, 서쪽 남락 고개 등의 고갯길을 넘어 양산을 경유하여 낙동강 유역으로, 반대로 낙동강 유역인 양산에서 동쪽의 해안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사방의 교통 요지이었다. 또한신라 초기부터 경주 남쪽의 소국을 정복하면서 형성된 경주 남방의 전통적인 교통로[경주~울산 범서읍 굴화리~울산 웅촌면~기장군 정관읍 월평리~부산광역시 동래구]상에 위치하여 동서를 연결하는 십자형(十字形) 교통망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장토지야에는 이러한 교통 요지로서의 입지가 고려되어 고려 시대에 금주도(金州道) 소속의 아등량역(阿等良驛), 조선 시대에 황산도(黃山道) 소속의 아월역(阿月驛)이라는 역참 시설이 지속해 설치·운영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신라 소국인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에 끼어 있던 장토지야는 오늘날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로 비정된다. 기장군 정관읍 월평리에는 반월성(半月城)이라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일대에 ‘장군대와 진계등’이라는 설화와 진치(陣峙)재·진계등(陣戒嶝)의 군대 주둔지와 관련된 지명이 남아 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권44 열전4 거도에 나오는 장토지야에 관한 기록을 모두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거도는 그의 가계와 성씨가 전하지 않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탈해 이사금 때 벼슬하여 간(干)이 되었다. 그때 우시산국과 거칠산국이 국경의 이웃에 끼어 있어 자못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는데, 거도가 변경의 지방관이 되어 그곳을 병합할 생각을 품었다. 매년 한 번씩 여러 말들을 장토의 들판[張吐之野]에 모아 놓고 군사들로 하여금 말을 타고 달리면서 유희 놀이를 하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마기(馬技)라 불렀다. 두 나라 사람들이 자주 보아 왔으므로 신라의 평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여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에 병마를 출동하여 불의에 쳐들어가 두 나라를 멸하였다[居道 失其族姓 不知何所人也 仕脫解尼師今爲干 時于尸山國·居柒山國 介居鄰境 頗爲國患 居道爲邊官 潛懷幷呑之志 每年一度 集羣馬於張吐之野 使兵士騎之 馳走以爲戱樂 時人稱爲馬技 兩國人 習見之 以爲新羅常事 不以爲怪 於是起兵馬 擊其不意 以滅二國].”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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