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203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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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闌出 |
영어의미역 | Stepping outside of the Terri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부산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순순 |
[정의]
조선 후기 동래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조선 정부가 정한 규정을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왜관 밖으로 나가는 행위.
[개설]
왜관 운영의 실태와 조선 후기 한일 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용어이다. 조선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외교나 무역과 관련된 일이 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조선 정부가 파견한 왜학 역관[훈도·별차]이 왜관에 들어가서 관수, 대관 및 재판 등과 협의하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그들의 요구가 훈도나 별차 선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는 왜관 밖을 뛰쳐나가 동래부로 몰려가서 동래 부사를 상대로 일종의 시위를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조선에서는 이것을 불법 행위로 간주하여 ‘난출’이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왜관 출입도 금지되어 있는데, 허가를 받지 않은 왜관 출입은 ‘난입’이라고 하였다.
[왜관 출입 규정]
조선 정부는 왜관에 체제하는 일본인들이 왜관을 벗어나 인근의 마을 등지를 함부로 배회하거나 통행하는 것을 매우 꺼려했기 때문에 왜관의 출입에 대한 규정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의 방침은 통교 업무와 관련하여 왜관에 출입하거나 업무상 일본인들과 접촉하는 조선의 관리나 상인을 제외하고 일반인이 일본인과 접촉하는 것을 최대한 봉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두모포 왜관에서는 수문(守門) 밖 좌자천(佐自川)을 경계를 삼았다. 또한 초량으로 왜관을 이전한 직후인 1679년에는 왜관의 동서남북에 금표(禁標)를 설정하여 왜관의 일본인들이 통행증 없이 무단으로 경계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왜관에 초소인 번소(番所)를 안팎 동시에 두었고, 출입문은 수문과 연석문(宴席門)에 한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6개의 복병소를 설치하여 경비를 엄격하였다.
[왜관 난출 사건]
난출에는 개개인에 의해 사적으로 이루어지는 난출과 집단행동으로 이어지는 의도적인 난출이 있다. 개인적인 난출, 예를 들면 왜관의 일본인이 조선인과 밀무역을 모의하기 위해 또는 왜관 인근 지역에 있는 온천이나 사찰을 방문하기 위해 왜관을 이탈하는 사례이다. 이 경우 조선 정부는 난출한 개인에 대한 처벌은 원칙적으로는 범죄 행위였지만 사안에 따라 달리 처리하기도 하였다.
조선 정부가 가장 문제시한 것은 관수의 허가 하에 이루어지는 왜관 내 대마도 관리들의 의도적인 난출이었다. 대관(代官)이나 재판(裁判) 등 일본 측 관리들이 주도한 난출은 조선의 대일 무역 정책이나 외교 교섭 등에 불만을 품고 의도적으로 대규모 이탈을 감행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이런 경우 난출은 조선 정부의 왜관 정책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일종의 시위 행위로 조선 측과의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하나의 전술이기도 하였다.
한 예로 1652년(효종 3)에는 왜관 개시 문제로 옛 규정을 회복하기 위한 논의 중에 대관(代官) 3명이 왜인 90명과 함께 왜관을 무단이탈한 것을 비롯하여, 1671년(현종 12)에는 조선이 왜관 이관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재판차왜(裁判差倭)가 왜인 200여 명을 이끌고 왜관을 뛰쳐나와 동래부까지 진출하여 난동을 부린 경우, 1697년에는 대마도의 소[宗] 씨가 조선에 파견한 재판이 왜관 사람들을 이끌고 왜관 밖으로 나간 경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697년은 울릉도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이 보낸 답서의 개찬을 요구하면서 관왜 132명이 난출한 사건이다. 난출한 이후 일본인은 부산진 앞에서 조선인과 다투었고, 그 와중에 그들이 소지하고 있던 칼을 조선인 농민에게 빼앗기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교섭 업무를 담당하였던 재판은 대조선 교섭이 자신들의 요구대로 추진되지 않자, 조선에 압력을 가하기 위하여 군중의 선두에 서서 난출을 감행했던 것인데,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 측은 왜인에 대한 조선인의 행패 사건으로 규정하여 일본인을 구타한 조선인의 색출을 요구하였다. 물론 조선 측은 이 사건을 관왜의 불법적인 난출로 간주하여 대응하였다. 결국 동래 부사는 관수에게 그 주동자의 처벌을 엄하게 요구했으나, 조선 측이 파악하는 범위 안에서는 난출을 주도했던 재판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683년 계해약조에서는 왜관 밖으로 무단으로 나갈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으로 ‘난출’ 문제에 대하여 약조가 정해지고, 일본인이 그것을 어기면 동래 부사가 그 사람의 처벌을 대마도에 요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조선 정부의 방침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왜관의 난출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는데, 조선 후기 대일 교섭 관련 등록류를 모아 정리해 놓은 『변례 집요(邊例集要)』에는 「난출」 항목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