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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신라 시대의 요양 문화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203610
한자 統一新羅時代-療養文化
영어의미역 Convalescence Culture of the Unified Silla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부산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전기웅

[정의]

통일 신라 시대 부산 지역에 있던 온천 휴양과 요양의 양태.

[개설]

통일 신라 시대 때 부산 지역은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와 해운대, 태종대와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수려한 자연 경관, 그리고 각종 질병의 치료에 효험이 있는 동래 온천해운대 온천 등이 있어서 요양과 휴식이 가능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무열왕(武烈王)은 태종대를 찾아 활쏘기를 즐겼으며, 최치원(崔致遠)은 신라 말에 중앙의 정치 사회에서 물러나 피곤한 심신을 휴식하기 위해 해운대에 머물렀다.

[부산 지역의 온천]

부산 지역의 온천은 신라의 국왕과 귀족들이 자주 찾아와 병을 치료하고 휴식하는 곳이었다. 해운대 온천은 알칼리성 단순 식염 온천으로, 라듐분이 함유되어 피부병·고혈압·류머티스·빈혈·소화기 질환 등 각종 성인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찍이 구남 온천으로 불렸는데 신라 51대 진성 여왕(眞聖女王)이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아 해운대에서 온천욕을 하고 나았다고 전해진다.

신라 때 절름발이 노파가 다리를 다친 백학이 치료되는 것을 보고 발견하였다는 동래 온천은 풍부한 수량과 염분을 주성분으로 하는 식염천으로, 피부병과 빈혈 등 각종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영취사(靈鷲寺) 조’에는 신라 제 31대 신문왕(神文王) 때인 “영순 2년(683)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장산국, 즉 동래의 온천에서 목욕하고 성으로 돌아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이때부터 신라의 귀족들이 동래 온천에 내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동래현 산천조’에도 “온정은 동래현의 북쪽 5리 지점에 있다. 그 물은 달걀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우며, 병자가 목욕하면 곧 치유되므로 신라 때에 왕이 여러 차례 이곳에 행차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네 곳에 돌을 쌓고 그 위에 구리 기둥을 세웠는데 그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라고 온정(溫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신라 당시부터 동래 온천은 매우 화려하고 석조로 만들어져 반석에 구리 기둥을 세웠으며 내외로 구분된 구조를 가진 왕실용 온천으로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07.26 일부 내용 삭제 삭제: 신라 왕의 왕래도 자주 있었는데 712년(성덕왕 11) 4월에 왕이 온수(溫水)에 다녀간 기록이 있다.
이용자 의견
김** 위의 동래온천에 '성덕왕이 온수에 다녀갔다는 기록이 있다.'는 문장은 삭제해야 합니다. 여기서 온수는 충청남도 아산시를 가리킵니다.
  • 답변
  • 부산역사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하의 의견을 확인하여 해당 오류 내용을 삭제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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